추리무협소설 <천지> 178회

등록 2007.04.20 08:29수정 2007.04.20 08:29
0
원고료로 응원
"무슨 문제가 있소? 어차피 거추장스런 존재들이오. 우리 손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철기문의 손을 빌리는 것이 나을 것 같고… 함곡 일행의 움직임까지 제어하는 효과까지도 있지 않소? 더구나 흉수가 예측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터져 주어야 더 빨리 모습을 나타낼 것 아니오?"

추 태감의 말에 중의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금방 깨달았다. 그들의 존재를 철기문에 알리게 될 경우 옥청문은 참지 않고 반드시 복수하려 들 것이고, 능효봉이란 놈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면 분명 자신을 의심하게 될 것이란 생각 때문에 무의식중에 말리려 했던 것인데 이를 관철하려면 속사정까지 모두 말해주어야 했다.


다시 한 번 중의는 내심 갈등을 했지만 아직은 밝힐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상황이 진전됨에 따라 말을 해주어야 했지만 그 시기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여야 했다.

"허허… 철기문에서 호락호락 믿어줄지 의문이라서 그렇소. 그들은 이미 동창의 비영조에서 혈간을 시해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단지 신 태감으로 한정한다 해서 그들이 믿을지 의문이오."

추 태감은 의혹스런 표정을 띠었다가 중의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하하… 걱정 마시오. 말씀대로 철기문에서는 믿지 않을 것이오. 허나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하자는 우리의 속뜻을 그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오. 명분만 주게 되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을 것이오."

적당히 속이고 속아주면 된다는 말이다. 무릇 정치와 권력의 속성이란 그렇다. 분명 적이지만 야합(野合)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정치에 몸담은 자는 그것을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는다'라는 말로 합리화시키기도 한다. 중의가 고개를 끄떡이자 추 태감은 왼손을 밖으로 가볍게 내저었다.


"가봐…."

"알겠습니다. 지금 곧 백호각으로 가겠습니다."

특별한 단서를 달지 않는 한 추 태감의 명령은 즉각 이행되어야 한다. 더구나 이 자리는 경후에게 영 불편했다. 어차피 조문도 가보지 않았으니 마침 잘된 일이기도 하다. 경후가 예를 취하고 문을 나서자 추 태감이 다시 천과를 보며 말했다.


"좌등도 손을 보도록 해."

"진번(辰幡)과 이번(離幡)을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천과는 생각을 해놓은 듯 주저 없이 대답했다. 팔괘 중 진(辰)은 우뢰(雷)고, 리(離)는 불(火)이다. 팔번 중 무공이 뛰어난 인물들임을 짐작케 해주는 위치다.

"좌등의 주위에 아무도 없을까?"

좌등의 주위에 조력자가 있다면 두 인물만으로 충분하느냐는 물음이다.

"좌등의 주위에 있는 수하들은 오륙 명 정도지만 진운청이란 자를 빼고는 특별한 인물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라면 충분할 것입니다. 귀산 노인은 건번(乾幡)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건번을 조금 일찍 보내 먼저 일을 끝내도록 한 다음 좌등이 있는 쪽으로 투입해 두 사람과 합류토록 지시하겠습니다."

건(乾)은 팔괘 중 우두머리이고 하늘(天)을 의미한다.

"귀산에 대해서는 자네들의 판단에 맡길 테니 알아서 하고… 아니다 싶으면 없애는 것도 괜찮아. 허나 좌등만큼은 아예 없애는 게 좋을 게야. 없앨 수 없다면 최소한 거동이라도 불편하도록 만들어 놔. 그래놓아야 내일 철호가 적절하게 손을 봐줄 것 아닌가?"

"물론입니다."

대답을 들은 추 태감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이 변하며 한 가닥 고민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그의 표정 변화에 천과나 중의가 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자 중의에게 물었다.

"쯧… 우슬이란 여아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미모이기에 학이 그 놈이 그토록 애를 태우는 것이오?"

추 태감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문제였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식 놈이 하도 신신당부를 해대니 추 태감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중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대단하긴 하지요. 사내를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소."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아무래도 본관이 한 번 보고도 싶은데…."

자식에 대한 일은 언제나 그렇다. 다른 일에는 고분고분 말을 듣는 아이가 우슬의 이야기만 나오면 양보하지를 않는 것이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천과의 옆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지공(地公)이 눈을 번쩍 뜨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문을 벌컥 열어 제겼다.

"……?"

허나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경후가 계속 문 입구에서 있었다가 방금 전 백호각으로 간 후의 시간은 매우 짧아서 누가 있었더라도 안의 말을 모두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공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도 느꼈던 것 같군."

어느새 그의 옆에 다가온 인후(人冔)가 나직한 음성을 발했다. 그들의 시선이 문 주위를 샅샅이 훑고 있었고, 청각을 최대한 높여 미세한 소리조차 놓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공이 고개를 끄떡임과 동시에 갑자기 검을 뽑아들더니 느닷없이 문 옆의 벽을 향해 쑤셔 넣는 것이 아닌가?

서너 번을 똑 같이 시도하더니 다시 방향을 바꾸어 벽 아래의 바닥을 향해 똑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속이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그는 바느질하듯 촘촘하게 찔러대더니 바닥을 뜯어냈다.

그러자 바닥에 어두운 공간이 나타났고, 주위의 바닥을 뜯어낸 지공은 지체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본래 바닥에는 일정한 공간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깊은 공간이 있는 것은 아주 희귀한 경우였다. 그는 그 안을 살펴보다가 특별한 이상이 없자 그 구멍을 나왔다.

아마 황촉불이라도 가지고 들어갔다면 미세하지만 다소 이상한 틈을 발견이라도 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자신의 안력을 믿었고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다 그냥 나오는 실수를 범했다.

"애꿎은 바닥만 손상해 놓았군. 내일 바닥에 흙을 채우고 막으라고 해야겠군."

지공이 인후를 보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인후 역시 고개를 잘못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야?"

안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추 태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일제히 대답했다.

"속하들이 좀 과민했던 것 같습니다. 저녁 식사 후부터 계속 인기척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공은 뭔가 찜찜한 표정이었다. 분명 그는 인기척을 느꼈고, 처음에는 경후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문 앞에 경후가 계속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경후가 백호각으로 간 뒤에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 터였다. 그래서 조사한 것인데 벽에 붙어있는 바닥에 제법 큰 빈 공간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매사 조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

추 태감은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허나 분명 누군가 그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단지 그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2. 2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3. 3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4. 4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5. 5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