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길 안 보이면 고전의 향기에 취해보시길

[서평] 고미숙의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등록 2007.04.23 21:23수정 2007.04.2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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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표지

책표지 ⓒ 아이세움

역사 속의 인물과 살아있는 우리들이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 고미숙은 10년 동안 연암 박지원과 우정을 나누었다고 했다. 지식을 배우는 건 우정을 나누는 것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며 역사 속의 연암과 고미숙의 우정은 지금도 쭉 계속되고 있다.

그 긴 시간의 우정이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란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10년간 열하일기에 녹아 있는 연암의 눈부신 삶과 철학을 가슴 콩닥거리며 찾고 갈무리하며 지내온 결실을 세상에 내놓으며 그 설레는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제 여기 모두 10개의 주옥같은 문장들을 채집하고 갈무리하여 세상 속으로 보낸다. 별은 서로를 비춰 줌으로써 빛난다고 했던가. 마찬가지로 보석들도 함께 어우러질 때 더욱 영롱하다. 그저 그 빛깔과 광채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터. 군데군데 붙어있는 나의 ‘군말’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보석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실마리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이 실마리에 엮인 연암의 말과 글을 따라가다 보면, 한성에서 연경, 연경에서 열하로 이어지는 멀고도 험한 여행의 지도가 한 눈에 그려질 것이다.(머리말 중에서)

북벌의 시대에 북학을 논하다

a 의주북경사행로

의주북경사행로 ⓒ 아이세움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은 병자호란의 책임을 면할 길이 없었다. 중립이 아닌 친명배금을 추구한 결과가 두 차례의 호란을 초래했고, 결국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패전의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굴욕을 씻기 위해 북벌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청에 대한 원수를 갚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이에 대한 반대를 용납하지 않았다.

중화의 대상인 명나라가 멸망했으니 진정한 중화는 조선이고, 병자호란에 치욕을 안겨준 청은 정벌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효종 이래 북벌론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벌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청을 향한 게 아니라 조선 내부를 향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북벌의 시대에 연암과 그의 벗들은 그 허위의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화에 근거한 헛된 북벌론을 비판하고 진정한 북벌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역설했다.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때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하셨으나,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 데 분개해서 중화의 훌륭한 문물제도까지 물리치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만약 정말로 오랑캐를 물리치고 싶다면 중화의 전해 오는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습속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67쪽)


연암과 함께하는 삼천리 연행길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나고도 출세의 길을 버리고 벗들과 어울리며 북학을 연구하던 연암이 청을 방문했다. 삼종형 박명원이 만수절 축하 사절로 중국에 가게 되면서 그 수행원의 자격으로 동행하게 된 것이다.

한양에서 출발해서 압록강을 건너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는 삼천리 여정이 열하일기에 담겨 있다. 저자 고미숙은 열하일기 중에서 정수가 될 만한 문장들을 엄선해서 연암의 사상과 문장을 눈부시게 되살려 놓았다.

북벌의 시대에 탄생한 북학론은 연암의 청나라 여행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정립된다. 맹목적인 중화사상에서 벗어나려는 연암의 노력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가장 큰 관문 산해관에서 ‘천하제일관’이란 현판 앞에서 중화가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지 깨닫게 된다. 오랑캐로부터 진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키며 쌓은 만리장성, 하지만 정작 진을 붕괴시킨 건 오랑캐가 아닌 내부의 적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도 명의 장수 오삼계는 이 관문을 통해 적을 맞아들이기 급급했다고 한다. 적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이 오히려 적이 중원을 공략하는 일차 관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흥하고 망하는 건, 적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산해관 앞에서 연암은 헛된 중화의 이념을 버리고 제대로 된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연암의 작품으로 알려진 <호질>은 연암이 창작한 게 아니라 이 여행 중 옥진현 한 점포에서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 벽에 가득하게 적힌 기문을 베껴왔다고 한다. 하지만 옆에서 베끼는 걸 도와준 정진사가 사고를 쳐서 군데군데 빼먹고 오자도 많아 그 부분을 채워 넣은 건 연암의 몫이었다.

<호질>에서 연암은 범의 목소리를 빌어 인간들의 허위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 부귀와 공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 툭하면 성(性)이니 리(理)이니 떠들어도 실제로는 천명을 개코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고 비판한다.

북벌의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당대의 현실 뿐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 비추어도 연암이 극복하고자 했던 허위의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선거 때면 국민을 위해 모든 걸 다 할 것처럼 떠들던 정치인들의 마음에 국민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툭하면 국민을 떠벌여도 실제로는 국민을 개코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

갈 길이 안 보일 때, 고전의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현대인이 읽기 쉽게 재구성된 책이면 더욱 좋다.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는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책이다.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박지원 원작, 고미숙 지음, 이부록 그림,
아이세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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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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