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식당에서 직원들과 다정하게 점심을 나눈다.최종수
“어떻게 하루 생활비로 한 달을 살 수가 있어요?”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뼈를 버리잖아요. 정육점에 가서 유학생인데 뼈 좀 구할 수 있냐고 하면 공짜로 모든 부위를 얻을 수 있지요. 어떤 뼈들은 살까지 붙어 있어 그 살점을 잘 발라내서 구워 먹기도 했어요. 그 뼈를 고아서 파와 마늘, 후추와 소금만 넣으면 훌륭한 곰국이 되는 거지요. 그리고 밥이야 쌀만 있으면 되잖아요.”
“장학금을 아껴서 영치금을 넣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예, 쑥스러운 이야기죠. 3년 동안 아끼니까 3백만 원이 되더라고요. 84년 말에 귀국해서 친구들과 양심수들 영치금으로 나누어 주었지요.”
그렇게 지독하게 공부한 끝에 아일랜드 골웨이의과대학에서 3년 만에 학위를 받고 아일랜드 의사고시에 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면서도 중증인 사회에 청진기를 대고 진단하고 치료하는 사회치료사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에서 의사고시에 합격하고 6개월 지방종합병원에 취업했다가 상경해서 구로구 가리봉동에 우리의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환자들 4명 중 1명이 산재환자였어요. 자연스럽게 산재와 직업병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87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을 맡아 직업병과 산업재해, 의료서비스의 공공성실천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상봉동 진폐규명, 문송면 수은중독사건, 원지레이온 직업병 검진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경대군과 김규정양 사망사건 진상조사단에 함께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많은 활동을 하다보면 가족들과의 관계도 쉽지 않을 텐데요?”
“저희 집에 운동권 출신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한번은 초등학고 3학년인 딸이 이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옥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모 아저씨 감옥에 갔다 왔어요?’ ‘응’ ‘누구 아저씨는?’ ‘응 감옥에 갔다 왔지’ ‘그럼 누구 아저씨는?’ ‘그 아저씨도 갔다 왔지.’ ‘그럼 아빠는?’ ‘나도 갔다 왔지.’ ‘그럼 엄마는?’ ‘엄마도 그렇지’ ‘아니 엄마까지도!’ 하면서 눈이 땡그래 지는데, 그런 딸아이를 보고 제가 더 큰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진지한 이야기에 녹차가 식은 줄도 몰랐다. 병원 안내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00병동의 중소 병원인데도 복도의 공간이 넓어 보였다. 6층 재활치료실 남쪽으로 난 전면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환자 중심의 병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처음 문을 연 곳은 물리치료실.
“종합병원 물리치료실 직원이 14명 정도인데 저희 병원은 18명입니다. 공간도 지하에 있거나 좁은 공간인데 6층에 있고 공간도 100평이 넘습니다.”
노동의 역사 한 복판에 선 녹색병원, ‘하루 8시간 근무’ ‘근로기준법 준수’라는 최소한의 노동자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분신한 전태일 열사로 시작된 70년대, 그리고 유신독재와 개발독재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노동자들의 의연한 저항, 독재의 탄압으로 추락사한 YH사건의 박경숙 열사가 추락사한 현장이었다.
그 후 가발공장이 문을 닫고 기독병원과 다른 병원으로 문을 열었지만 외환위기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 병원을 인수하여 노동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녹색병원은 전두환 독재에 제적을 당하고 우여곡절 끝에 떠난 아일랜드 유학이 그 희망의 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