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점 시인의 첫 시집 <차가운 식사> 표지최육상
삶의 이곳저곳을 훑고 있는 시선이 집요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처절하게 지는 꽃들, 누군가가 연주하고 있는 사람의 손, 가족을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밤새 집안을 헤엄쳐다닌 굴비 한 마리, 판옵티콘의 세상에서 사는 아르고스 같은 그 여자 등 삶의 이모조모가 드러난다.
그 시선에는 시인이 삶에 보내는 애정이 담겨있다.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뒤, 첫 시집 <차가운 식사>를 발간한 박홍점 시인. 6년간의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시인은 소소한 일상의 순간과 작은 생명의 존재에 '꽂힌 눈빛'을 62편의 시로 풀어냈다.
아버지의 젓가락, 이제 수저통 속에 갇혀 있다
수저통 속 여러 벌의 수저들 사이에서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고 제일 먼저 나가고 제일 먼저 놓이고 제일 먼저 닦였다 (중략) 영원히 모서리가 닳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의 젓가락, 더러는 조준에 실패한 선수처럼 아버지도 집어 올리다가 떨어뜨리고 드는 것조차도 힘들어 고개 내젓더니 이제 수저통 속에 갇혀있다
- '젓가락' 중 일부
새벽에 일어났더니 / 어젯밤에 구워 먹은 굴비 한 마리 / 살아서 퍼덕인다 / 밤 동안 온 집안을 헤엄쳐 다녔다보다/ 출구를 찾지 못해 얼마나 지느러미가 아팠을까 / 문을 모두 열어 놓아도 나가지 못한다 / 밤사이 수많은 새끼를 낳았는지 / 가는 곳마다 조기새끼들이 꿈틀거린다
- '냄새' 중 일부
시인은 평범한 존재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일상을 파고드는 눈빛으로 잡아낸다. 시인은 "어머니는 몇 번쯤 그 젓가락을 내동댕이쳤을까 말다툼이라도 하신 날은 더 길어지고 날카로워지던 젓가락"이라며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젓가락에 담았다.
또 냄새 때문에 굴비의 지느러미를 걱정하는 것이나, "굴비떼를 풀어놓고 오래도록 그 길을 바라볼 것"이라며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더욱 좋겠지"라고 소원하는 모습에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물씬 피어난다.
누군가 그를 연주하고 있다, 벙어리 악기
누군가 그를 연주하고 있다
열 개 손가락이 현악기의 줄처럼 떤다
벙어리 악기.
일제히 소리 나지 않는 악기 위로 쏠리는 눈빛들
입 안 가득 모래를 머금어서 모두들 말이 없다
차마 소리로 표현하지 못한 그의 이력이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린다
집게발을 쳐들고 알을 터는 꽃과 같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알 수 없는데
온몸의 가지들이 바람을 탄다
뜨거운 물을 붓던 주전자가 컵의 테두리를 벗어나
살얼음 같은 유리에 금이 간다
바람이 바람을 부른다
내가 만지는 컵이며 재떨이 따위가 흔들인다
눈빛이 머무는 것마다 덜덜 떠는
오그라붙는 방안의 사물들.
사물의 심장들
그가 돌아간 뒤에도 연주는 남아 어른거른다
흘러간 그의 연주를 오래 듣는 생살의 밤이다
- '수전증' 전문
시인의 눈에는 손을 떠는 모습이 현악기의 줄로, 벙어리 악기로 잡힌다. 유리에 금을 가게 하는 것도, 방안의 사물들을 오그라들게 하는 것도, 계속 어른거리며 남은 연주도 모두 수전증 때문이다. 삶의 이곳저곳에 꽂는 시인의 눈빛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참으로 집요하게 이어진다.
어릴 적 동네 언니, 오빠의
복숭아밭에서의 뜨거움은 왜 말하면 안 되었는지
온 가족이 모인 밥상머리에서
오빠한테 느닷없이 한 볼태기 얻어맞고
뺨 얼얼하게 붉어지기도 하였는데
향기가 추억을 불러낸다 과일 코너에서 혼자 웃는다
수십 개 진열되어 있는 복숭아 중에서
꼭지에 잎이 달린 복숭아에 눈빛이 꽂힌다
아직도 싱싱한 이파리 한 장
복숭아나무가 나한테 보낸 편지라는 걸
편지의 겉장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 '눈빛이 꽂히다' 중 일부
판옵티콘의 세상, 어떻게 새롭게 볼 것인가
"눈빛이 꽂힌다"고 고백한 시인의 말마따나 이러저러한 삶에 눈빛이 꽂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인은 시집 마지막에 실은 '시인의 산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판옵티콘panopticon의 세상이다. 어딜 가나 눈이 있다. (중략) 그래서 한시도 본다는 것, 보여진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렌즈 안에 잡혔을 때 모든 관계는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눈앞의 사물이나 어떤 현상을 만났을 때 가능한 이면을 보려는 노력에 집중했고 다른 눈, 어떻게 새롭게 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 그 같은 고민은 쓰기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충분한 과제였다.
가능한 일상으로부터,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족이나 그외 현실적 무게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열망 때문에 시라는 한 장르를 선택했을 터인데 시집 원고를 정리하고 보니 실상 그간 나를 담고 있던 그릇이 무엇이었는지 확연해지고 말았다."
젓가락에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굴비 냄새에서 한밤의 헤엄을 맡아내고, 수전증에서 악기 소리를 듣고, 복숭아에서 오빠의 옛사랑을 추억하는 시인의 감수성은 그 원천이 이제 분명해졌다.
시인의 꽂힌 눈빛은 "원고를 정리하면서 나는 도처에서 눈을 만났다"며 "단순히 스스로가 본다는 것을 넘어서서 보여지는 사물들, 비추어지는 세계, 나를 재단하고 꿰뚫는 수많은 눈들의 한 가운데 내가 있었고 그 지점에서 내 시의 탄생이 시작되었다"는 고백과, 많은 눈을 가졌다는 신화 속 등장인물인 '아르고스로 그녀를 표현한 데서도 읽힌다.
절해고도의 섬으로 마루 끝에 앉아 바람이 가랑잎만 건드리고 가도 주저앉는 눈꺼풀로 말을 걸더니만 떨어져 나간 살점들 혼자였던 시간들을 오래 주물럭거렸던가 감겨버린 두 눈 대신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 상처들 모두 눈이 되어 백 개의 눈을 가졌고 마디 마디 떨어져 나간 손끝눈으로 깜박깜박 먼 과거를 먼 미래까지를, 입에 담기조차 불길한 예감들을 거침없이 내뱉곤 했다
- '아르고스, 그 여자-내 영혼의 살점이 떨어질 때 너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중 일부
현대인들은 작은 생명들과 지나간 추억들 속에 담겨 있는 삶의 이야기들에 큰 관심을 두지 못한다. 대개 바쁜 일상에 쫓긴다는 비슷비슷한 이유로. 이런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그마한 휴식일 터.
처음으로 만난 박홍점 시인의 시이지만, 일상을 잔잔하게 돌아보는 그녀의 눈빛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그녀의 꽂힌 눈빛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는 것도 피곤함을 잊는 한 방법이 될 듯싶다.
덧붙이는 글 | <차가운 식사> / 박홍점 시 / 서정시학 출판 / 143쪽 / 6000원
기자 주 : 판옵티콘 - 원형감옥을 말하는 것으로, 감시와 통제의 시선을 자유롭게 하는데 의미가 있다. 시인은 여러 시선이 난무하는 세상을 판옵티콘의 세상이라 표현한 것 같다.
차가운 식사
박홍점 지음,
서정시학,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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