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86회

등록 2007.05.02 08:27수정 2007.05.0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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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저런 식이다. 수백 년 동안 화려한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 남궁가의 핏줄이면서도 버려진 아이처럼 자란 환경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언제나 믿음직하군요. 수고했어요. 돌아가 쉬도록 하세요. 남은 아이 하나는 본 회주의 귀비(貴妃)가 이미 처리했을 거예요."


단철수화의 말이 떨어지자 사내는 더 이상의 대꾸 없이 몸을 우측으로 틀어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할 일이 끝났다고 하는 순간 그의 모습은 방금 일어났던 사건들이 모두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듯 했다. 평범한 걸음이었지만 발자국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단지 이슬이 내린 탓만은 아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단철수화는 호악(好惡)의 감정이 교차되고 있었다. 지금 추진하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필요한 사내였고, 또한 믿을 수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딸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저런 목석과 같이 감정이 죽은 사내와 결혼하면 아무리 천궁문(天宮門)의 율법에 따르더라도 딸아이는 불행해질 터였다.

그럼에도 딸아이와의 혼사를 결정한 것은 저 사내만이 삼합회가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남궁가 역시 가문의 핏줄로 인정하기 싫었음에도 저 아이를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사내의 일초식은 정말 무서웠다. 지금까지 두세 번 보았지만 자신마저도 저 사내의 일초식을 완벽히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기습적으로 자신을 공격한다면 십중팔구 자신 역시 일접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었다. 허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불길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대신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하나마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상만천의 이목은 모두 제거된 셈인가? 운중선에서 두 아이를 처리해 주어 쉽게 끝냈군."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연무장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상만천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그녀가 아주 조용히 운중보에 들어온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아무도 주목하고 있지 않았지만, 더구나 적당히 상만천과의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삼합회란 곳이 어떤 성격의 집단인지 안다면 그 목적은 분명했다.

"상만천… 너는 이제 반드시 이 운중보 내에서 뼈를 묻게 될 거야… 그와 함께 네가 이룩한 모든 것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신형은 어둠을 갈랐고, 한 마리의 야조처럼 사라져갔다.

----------

"벌레가 많군요. 향을 피어놓았으면 벌레가 사라져야 하는데…."

느닷없이 자시 가까이 되는 늦은 시각에 조문이랍시고 와서는 대충 향을 한 움큼 짚어 올리더니 하는 말이 이것이었다. 그것도 사내라면 다른 것 제쳐두고 와락 끌어안고 싶은 미모의 여자가 아미(蛾眉)를 살짝 찌푸리며 속삭이듯 말을 하자 목석같은 마음을 가진 백도라 해도 불을 보고 들어온 날벌레들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명첩을 보니 삼합회 소속의 여인이다. 삼합회의 회주이자 궁수유의 모친인 단철수화 궁단령이 들어왔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다. 궁단령을 본 적도 없지만 눈앞의 여인은 잘해야 이십대 후반이나 삼십 갓 넘을 듯한 나이로 보아 궁단령은 아닐 듯싶다.

더구나 갸름한 얼굴에 사내를 홀릴 듯한 염기(艶氣)와 교태(嬌態)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미태여서 돈 많은 부호의 처첩은 될지언정 삼합회 같은 곳의 수뇌라고 보기엔 무리였다.

"……!"

백도는 앵두같이 빨간 입술을 혀로 살짝 핥으면서 촉촉한 눈길을 던지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보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누구든 상관없이 지금 던진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백도가 아니다. 잠시 늦은 시각 갑작스런 여인의 문상과 그 여인의 교태에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주위를 맴도는 벌레는 쫓아버리거나 잡아 죽일 생각이었다.

백도가 미소만 지을 뿐 말이 없자 여인은 더욱 교태스런 몸짓을 하며 상청 앞에서 일어나더니 백도 쪽으로 다가왔다. 코를 자극하는 향기로운 여인의 냄새가 지핀 향 내음을 멀리 쫓아내고 후각을 자극했다.

"아무래도 남정네들만 있었던 곳이라 벌레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군요."

여인의 숨결이 코끝을 자극하는 듯 했다. 이 여인은 지금 자신을 유혹하는 것일까? 어쩌면 선천적으로 사내의 손길에 익숙해져 있는 교태로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내의 노리개 감으로 키워진 여인이라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그런 몸짓과 음색이 나올 것이다.

"나는 벌레 잡는데 익숙하지 못하오."

"소첩이 잡아 드려야겠군요. 여자들은 그런데 아주 익숙하거든요."

백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아주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는데 돌부처라도 정말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든 미소였다. 더구나 여인은 얼굴까지도 천천히 백도 쪽으로 갖다대고 있었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소."

말수가 워낙 없는 백도라 해도 이렇듯 사내의 마음을 녹이는 여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아무 상관없는 사이에 자신이 해야 할 귀찮은 일을 떠맡아 준다는데 굳이 냉담하게 대할 필요도 없었다.

"감사는 말로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벌레 잡는 일은 그리 쉽지 않거든요."

여인이 또 한 번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서 교태로운 미소를 짓자 백도는 잠시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까지도 사내의 본성을 자극했다. 하지만 백도는 자제력이 강한 사내였고, 금방 이 여인이 뭐가 목적이 있어 자신을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어떠한 답례를 하면 되겠소?"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는군요. 운중보 내에 가장 조심해야할 흉신악살(凶神惡殺)이라고들 떠들어 소첩은 당신을 만나러 오면서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몰라요."

"흉신악살?"

"죽음의 그림자라고도 하더군요. 하지만…."

그녀는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까지 얼굴을 백도에게 갖다대고 있는 상태였다. 음색도 약간 비음이 섞여 입김이 백도의 얼굴을 감쌀 때마다 묘한 충동이 일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내 같았으면 벌써 여인의 몸을 끌어안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강한 사내이고 또한 진정한 사내이군요. 그런 소문은 당신을 몰라서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두렵기 때문에 하는 말일 거예요."

칭찬은 대개 상대를 기쁘게 만들지만 특히 이런 여인의 칭찬이라면 더욱 기분 좋게 만든다. 더구나 사내에게 진정한 사내라고 하는 것을 싫어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백도는 미소를 지었다. 흰 이가 드러나도록 환한 웃음이어서 정말 여인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허나 동시에 백도는 왼손을 올려 그녀의 어깨 쪽에 올려놓았는데 그것은 마치 자제력을 잃고 그녀를 안으려는 듯한 모습이어서 누군가 보았다면 백도를 여자에게 홀린 치한으로 오인했을 것이다. 아니 여인마저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만약 백도의 입에서 전혀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여인은 그렇게 믿었을 터였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어지? 그리고 너는 누구야?"

백도는 상체를 기울인 그녀를 살짝 안고 있는 형상이었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거골혈(巨骨穴)에 닿아 있었고, 조금만 움직이면 치명적인 사혈인 대추혈(大椎穴)을 제압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진짜 자신이 좋아 안은 사내를 바라보는 눈길로 입김을 불어냈다.

"소첩은 회주님을 모시는 삼비(三妃) 중 귀비(貴妃)라 해요.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아직 없지만 나중에 생기면 말씀드리죠."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미색도 미색이려니와 여인답지 않게 대담했다. 백도는 손을 내렸고 그녀를 충동적으로 안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천궁문의 문주인 궁단령의 수족이 그녀였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비(妃)라는 말처럼 여인인 천궁문의 문주 첩실이라고도 전해지는 삼비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녀는 백도가 자신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자 입김을 장난스레 백도의 얼굴에 불어대고는 생끗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치마를 끌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나간 지 일각도 못되어 백도는 아주 미세하지만 누군가의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벌레 한 마리를 지근지근 밟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벌레는 아마 일접사충 중 마지막 남은 봉(蜂)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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