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서울의 하늘.이희동
계단이 끝나자 곧이어 정상,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청계사의 봉우리 중 민간인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우면산도 그랬듯이 청계산 역시 그 정상은 군의 몫이었다. 거대한 구조물들이 산꼭대기에 자리하여 이 시대가 아직 정상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산에 올라 언제까지 저런 무식한 구조물들을 봐야 하는 것인지.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비록 날씨는 화창했지만 뿌연 날씨 덕에 시계가 좋지 않아 저 멀리 양재동 너머 서울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과천 방향으로는 서울대공원에 한창인 벚꽃과 과천 경마장 옆 연푸른 신록이 가까스로 보였다. 친구는 아쉬워했지만 서울의 답답한 아파트 숲을 보지 않아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한 정상에는 청계산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청계산 이름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설명인 즉, 많은 이들이 착각하듯이 청계산의 이름은 '맑은 계곡'이 아니라 '푸른 닭'이라는 의미다. 산의 이름이 푸른 닭? 안내판은 이어서 청계산의 원래의 이름이 풍수 상 관악산과 짝지어져 좌청룡으로서 청룡산이라는 것도 덧붙이고 있었다.
청룡산과 청계산이라. 비록 안내판은 그 개명의 이유까지 밝히고 있지 않았지만 짐작컨대 그것은 일제의 짓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름에서부터 반항의 싹을 자르려는 일본이었기에 용을 닭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아니면 17세기 중반부터 자신들을 소중화라고 칭하며 그 사대주의적 사관을 공고히 했던 조선 지배층들이, 청룡산에 감히 쓰이던 '龍'자를 지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바뀌었고, 그 바뀐 이름이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내려 온 것은 많은 이들이 나처럼 '청계'를 푸른 닭이 아니라 맑은 계곡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싸 갔던 김밥에 맥주, 오이까지 먹었음에도 하산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지막한 산을 계단 따라 왔으니 시간이 걸릴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하산 방향을 청계사로 잡은 뒤 청계산을 종주하기 시작했고 이제야 제대로 산을 타는 듯했다. 그래, 그래도 명색이 산인데 이렇게 바위도 타고 줄도 잡고 호젓한 오솔길도 걷고 해야지. 물론 종주라는 단어가 부끄러울 정도로 완만한 길이었지만 어쨌든 산행의 즐거움은 만끽할 수 있을 만큼의 발걸음이었다.
대체로 청계산은 그 느낌이 우면산과 비슷했다. 나지막한 산등성이들이 고르게 펼쳐져 있는 모습과 땀도 흘리지 않을 만큼 평탄한 종주길, 특히 정상에 위치한 군부대와 그 뒤로 자리한 정상까지 이어진 잘 닦인 도로, 큼지막한 헬기장은 이곳이 우면산인 양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다만 도심의 경계를 따라 위치한 우면산과 달리 양 옆으로 숨 막히는 도심 대신 산들이 펼쳐져 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점점 사찰 트렌드로 굳어지는 동자승 인형들
종주의 끝, 청계사로 들어섰다. 개인적으로는 청계산의 유명세만큼이나 고색창연한 사찰을 기대했건만 청계사의 거의 모든 전각들은 최근 것들로 보였고 대신 그 유명한 청계사 우담바라 이야기만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사찰은 나같이 뜨내기손님보다는 기적을 찾아 한달음에 찾아오는 신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