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이후 우리는 왜 노태우를 선택했나?

[6월을 말한다] 6월 민주화항쟁이 남긴 과제와 반성

등록 2007.05.08 14:26수정 2007.05.11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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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독재정권들은 국가운영 원리로 '자유민주주의'를 중심이념으로 표방하였지만, 70년대 유신체제에 기반한 박정희 정권은 의회제도 및 선거제도를 비롯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인 형식조차도 부정했으며, 80년대 신군부 세력인 전두환 정권은 광주항쟁과 학생운동 등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통해 정권을 유지할 만큼 '고도화된 물리력'에 의존하였다.

또한 민주적 절차가 무시된 '간선제'를 통해 선출된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체육관 대통령'이라고 불릴 만큼 그들의 정치적 정통성은 매우 취약했다.

즉 독재정권들이 주장했던 '자유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자유민주주의가 파괴되어온 과정이었으며, 그들의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합리화 시키고 군부의 정치개입 및 공권력의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독재정부로 인해 억압된 사회구조와 그들의 취약한 정통성은 '민주화'를 바라는 범국민적인 요구로 나타났다.
독재정부로 인해 억압된 사회구조와 그들의 취약한 정통성은 '민주화'를 바라는 범국민적인 요구로 나타났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결국 1980년대 중반(1985년 2.12 총선 이후)에 들어서면서, 극도로 비합리적이고 억압된 사회구조와 정통성 없는 정부를 성토하는 요구하는 목소리는 범사회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야당과 재야단체를 중심으로한 '민주세력'은 당시의 노동자, 학생,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으며 독재정권의 억압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들은 직선제 개헌과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 민간정부로의 정권교체와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 등을 골자로 한 '실질적 민주주의'를 함께 요구하며, 헌법개정을 주장하게 된다. 그렇지만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반발한 민주세력은 전국 각지에서 장기집권의 음모를 비난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연이어 벌였다. 또한 이 와중에 박종철 사건이 애초에 당국이 발표한 내용과는 달리 고문치사로 인해 사망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1987년 6월 10일에는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다.

그 후 26일에는 전국 37개 도시에서 사상 최대의 인원인 100만 명 이상이 밤늦게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어졌다. 이처럼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결국 전두환 정권도 어쩔 수 없이 4·13 호헌조치를 철회하게 되었고, 29일에는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6.29 특별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전국적으로 넘쳐가던 그 때, 5공 정부는 1987년 6월 10일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통해, 같은 군부세력 출신인 육사 11기 노태우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권력승계 절차를 원만히 이어가고 있었다.

5공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로 가득했던 그 때에도 권력이양을 위한 수순을 원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5공 정부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로 가득했던 그 때에도 권력이양을 위한 수순을 원활하게 진행하고 있었다.청와대
또한 '6.29 특별선언'을 5공 세력의 적자 노태우를 통해 발표하게 함으로써, 그를 졸지에 현실적 민주화의 중심세력으로 둔갑시키고 만다. 즉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 특별선언'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성취되고 전두환 독재정권의 막은 내리는 듯했지만, 이러한 교묘한 정치적 전략은 대중적인 여론을 크게 환기키며, 합법적인 방식으로 군사정부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본격적인 대통령선거에 들어가자 그동안 반독재 전선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민주세력의 대열이 갑자기 흐트러지며 분열되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이전의 '대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했으며, 이로 인해 민주세력은 야권의 후보 단일화를 두고 분열과 대립을 거듭했다. 즉, 김영삼은 '당내경선 방식'을 통해 김대중은 '전국 지지유세'를 통해 후보를 정하자고 했으나, 결국 이 양김의 후보 단일화는 결렬되었다.

이후 통일민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이 공식적으로 대통령출마선언을 하자 김대중은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독자적인 대선 행보에 나섰다. 재야운동권 역시 양김 사이에서 편 가르기에 급급했고, 일부 운동권은 백기완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며 마지막까지 범 민주세력의 '후보단일화'를 촉구하였지만 실패했다. 다시 말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한데 모아줄 민주세력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6월항쟁 당시 민주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씨
6월항쟁 당시 민주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 씨인터넷 6월항쟁기념관
결국 36.7%의 득표율을 얻은 민정당의 노태우가 28.0%를 얻은 통일민주당 후보 김영삼, 27.0%를 얻은 평민당 후보 김대중을 물리치고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가장 낮은 득표율로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6월 항쟁을 통해 솟아난 범국민적인 민주화 열기는 5공 정부의 정치적 전략과 권력을 향한 양 김씨의 욕심과 독선. 이로 인해 발생된 '후보단일화' 실패로 5공 군부세력의 재집권을 허용해주고 말았다.

6월 항쟁의 의미는 숭고하고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소중한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값진 민주화를 이루고서도 범국민적인 민주화의 열기를 한데 모으고, 교묘한 정치적 전략을 통해 재집권을 노리는 5공 세력을 막지 못한 당시 민주세력의 역량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

또한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구도가 무너지고, 13대 대통령선거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역주의 정서' 역시 도래할 새로운 정치문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독재정권이 물러난 빈 자리에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그들의 정치적 야망이 만들어 놓은 낡은 정치적 잔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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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6월민주화항쟁 #민주화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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