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남녀차별금지법' 탄생했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헌법학자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등록 2007.05.08 11:58수정 2007.05.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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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윤후정 명예총장은 99년 여성특위원장 퇴임 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로부터 제15회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왼쪽 부터 당시 최영희 여협 회장, 정의숙 이화학당 이사장, 윤 명예총장, 김정숙 국회의원, 김선욱 이화여대 법대 교수, 이상화 철학과 교수.

윤후정 명예총장은 99년 여성특위원장 퇴임 후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로부터 제15회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왼쪽 부터 당시 최영희 여협 회장, 정의숙 이화학당 이사장, 윤 명예총장, 김정숙 국회의원, 김선욱 이화여대 법대 교수, 이상화 철학과 교수. ⓒ 여성신문

사실 그는 여성특위원장으로서 헌법소원이 제기된 98년 10월보다 석 달 앞선 7월, 제32·34회 국무회의에서 두 차례나 군 가산점제 문제를 제기해 이미 이슈의 물꼬를 텄다.

언론들은 일제히 주목했고 '남녀 국무위원 대결' 식으로 자극적인 타이틀도 등장했다. 그러나, 국무회의에서 군 가산점제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적지 않은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여성특위 이전 정무(제2)장관실에서도 군 가산점제의 부당성에 대한 얘기는 내부적으로 있어 왔으나 공식적으로 얘기를 꺼내지는 못했던 사안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신설된 문화관광부 신낙균 초대 장관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그를 지지해준 것은 지금까지도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JP "군가산점제 문제 다시 꺼내지 말라"

"군가산점이 너무 과도해 남성 합격률은 절대적으로 높은데 비해 여성은 공무원 시험에 붙으려야 붙을 수가 없다고, 적어도 이제까지 군 가산점을 5% 적용했다면 이제는 2.5%로, 3% 적용했다면 1.5%로 내려서 적용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랬더니 국방장관, 보훈처장은 물론 군인 출신인 김종필 국무총리가 굉장히 경색된 표정을 지었고, 그날로 그 안건에 대한 논의는 중단됐다. 특정 안건이 국무회의시 논의가 중단되면 더 이상 상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난 그 다음에도 또 그 안건을 꺼냈다. 정식 국무위원이 아닌 '장관급'인데도 불구하고…."

이후 김종필 총리는 그를 특별히 불러 언짢은 기색으로 "그 문제를 다시 꺼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총리이신 상관께는 죄송하지만 한국의 전 여성을 대표해 여성권익과 관계된 것을 얘기 안할 수 없다. 여성계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대응했다.

a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직속 초대 여성특위원장 임명장을 받는 모습.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직속 초대 여성특위원장 임명장을 받는 모습. ⓒ 여성신문

군대와 관련된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가슴 철렁했던 기억은 국방부의 국군간호사관학교(국간사) 폐지 시도였다. 간호장교들의 호소에 따라 그와 신낙균 문광부 장관, 후에 16대 국회의원이 된 최영희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 세 사람이 천용택 국방부 장관을 면담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천 장관에게 "IMF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에서 1차 타깃이 여성이 되듯 군대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문을 열자, 천 장관은 "국간사를 없애도 간호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나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오만가지 이론을 다 끄집어내 반박을 했다. 국간사를 정 폐지하고자 한다면 육·해·공사도 다 구조 조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까지 했다. 결국 국방부의 국간사 폐지 시도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당시 여성특위의 위상 상 서럽고 불편한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부처별로 장관은 장관끼리, 차관은 차관끼리 논의를 하게 마련인데 장관급 위원장에 '사무처장'만 있는 직제의 한계 상 당시 차관급인 예산청장과 예산증가 요청 문제를 의논하려 해도 의논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는 정부청사로 달려가 예산청장이 보일 때까지 두 시간 여 동안을 차 안에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처럼 맹목적으로 뛴 결과, 여성특위는 예정된 예산보다 2배가량 예산이 증액됐고, 사무실이 마땅치 않아 문화관광부 8층의 절반 정도만 빌려 쓰다가 조달청으로 자리를 좀더 넓혀 옮겨가는 등 대내외적 위상이 차츰 높아져갔다. 초미니 부서로서 의기소침해 있던 직원들의 사기도 점점 올라갔다.

a 98년 여성 자원봉사자 발대식 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98년 여성 자원봉사자 발대식 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 여성신문

국간사 폐지시도에 조목조목 반박

이런 갖가지 시도 끝에 여성특위를 장기적으로 발전시키려면 결국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는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찾아가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왜 여성특위원장으로서 대통령을 직접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기구론 제대로 일할 수 없다, 예산도 적고 집행력도 없는데다가 국무위원이 아니니 국무회의에서 발언도 제대로 못하고 어쩌다 발언하면 눈총이나 받곤 한다, 그런데 여성계는 굉장한 기대를 갖고 바라보고…. 도대체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이희호 여사는 그의 말을 낱낱이 메모했다.

그리고 이틀 안에 청와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DJ와의 면담엔 조규향 청와대 사회복지수석이 배석했다. 9월 초 1시간여에 걸친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그는 대선후보 시절 여성정책 공약과 취임사에서 나타낸 여성정책 의지를 들어 '국민의 정부'는 여성능력을 개발하고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의 남녀차별 장벽을 제거하며 특히 정치 분야에 여성을 많이 진출시키겠다고 했는데, 이를 "실질적으로 실천해드리는 게 여성특위의 역할 아니냐"는 말로써 포문을 열었다.

"'대통령 직속'이란 면에서 장점은 많지만 현실적으로 대통령께서 어떻게 일일이 여성특위 사안을 챙길 수 있겠느냐고 말씀드렸다. 여성특위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여성부'로 만들어주고, 또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케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특히 공약에 내건 대로 정부 산하 각 위원회에 2000년까진 20%, 그 이후에는 30% 여성할당을 지키게 해달라고 말씀드렸다.

대통령께선 '법이 금지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선 대통령을 믿고 힘껏 뜻을 펼치라'고 말씀하시며 배석한 조 수석에게 오늘 얘기 나눈 내용이 잘 시행되도록 협조해달라고 하셨다. 이후 국무회의에서도 여성특위를 잘 도와달라는 당부를 했다."


a 9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태지역 여성장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왼쪽에서 두번째.

9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태지역 여성장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왼쪽에서 두번째. ⓒ 여성신문

DJ와 독대 후 여성특위 힘 실려

DJ와의 면담 후 여성특위는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켰다. 단, DJ는 여성부 신설에 대해서만은 "여성특위가 생긴 지 얼마 안되니 조금 지나서 보자"며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여기서 행정기구로서의 여성특위의 한계를 보완해줄 여성부가 머지않아 발족할 것이란 것을 예감했고, 여성부를 겨냥한 준비작업에도 신경을 썼다.

타고난 정력적인 기질과 헌법학자로서의 경륜, 그리고 여성의식과 이에 대한 소명의식이 정부 한 기관장으로서의 역할론과 행복하게 맞물린 최대 성과물은 아마도 남녀차별금지법의 탄생일 것이다. 이 법에 대한 그의 뿌듯함은 각별해 보통 사람들이 말하듯이 약식으로 '남녀차별금지법'이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이야기 여성사를 위한 다섯 차례 10시간을 훌쩍 넘기는 릴레이 인터뷰에서도 이 법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늘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란 정식 명칭을 사용하곤 했다.

그의 표현대로 "한국 여성사에 굵은 획을 긋는 한국 여성의 인권법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을 받는 계층을 없앰으로써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해나가는 계기를 마련한" 법이며 "여성 입장에선 자신의 능력과 실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여성자원을 국력화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게 된 계기"가 된 법이기에 그 중요성은 가늠할 수조차 없다.

반면, 법이 통과돼 제정되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진통과 극적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법안이 국회를 최종 통과했다는 낭보도 99년 1월 6일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열린 여성지도자 신년교례회장에서 들었다.

법안 통과의 최대 난항은 자문기관 적 한계를 지닌 여성특위의 성격상 준사법적 권한을 부여할 수 없다는 논리, 그리고 후에 대대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된 '(직장 내) 성희롱' 규정 삽입 문제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성희롱 문제는 개개인에게 맡길 사안으로 법 규제가 지나치다는 의견이 많았다. 전자의 경우, 헌법학자의 이력으로 여성발전기본법 등 다양한 법률의 내용들을 집행하는 면 등을 들춰서 여성특위가 집행기관과 행정기관 적 성격도 갖는다고 설득했으나, 성희롱의 경우엔 정서적 부분과도 맞닿아 있어 설득작업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평소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던 남성 의원들의 동의조차 얻기 힘들었다. 여기서 여성 문제의 구석구석에 가선 시각이 달라지고, 관념과 가슴이 다르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말 배고파서 젖 달라, 밥 달라 졸라야 하는 사람의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법안 통과 가능성이 상당히 비관적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그는 힘껏 나름대로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를 펼쳤다. 주로 의원회관 복도에서나 주차장에서 관련 의원을 만날 때까지 하염없이 무작정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기다리는 '시간 투자'가 그의 방식이었다. 때론 보좌관을 직접 붙들고 호소하기까지 했다. 차명희 사무처장, 박우건 차별개선조정관 등 실무자들과 말 그대로 의원회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a 98년 대통령직속 여성특위에 ‘여성차별신고센터’를 설치한 후 관계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윤 여성특위원장(가운데 현판 옆).

98년 대통령직속 여성특위에 ‘여성차별신고센터’를 설치한 후 관계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윤 여성특위원장(가운데 현판 옆). ⓒ 여성신문

의원들 두 세 시간 기다리며 설득

국회 이전엔 관련 부처들 간 조정과 협력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특히 법무부가 인권법 제정과 관련, 후에 설치될 인권위원회의 여성차별 부분과의 중복 문제 때문에 균형을 맞추라는 요구를 끈덕지게 해와 힘들었다. 그 후 마지막 고비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분과에서 차별행위에 대한 강제적 '시정명령권'을 삭제하지 않으면 법안 통과를 안시켜주겠다고 강경히 나왔을 때였다. 당시 그는 40여분 간을 묵묵부답 한 채 가만히 서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속으로 울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눈물을 머금고 '시정권고권'으로 타협"했다.

"법안 통과 과정에서 심지어는 일부 여성의원들도 거부감을 보였다.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소관위 여성의원실 문 밖 복도에서 3시간을 꼼짝 않고 기다렸는데,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내 손을 뿌리치고 사라져버릴 때의 그 심정이란…. 그 사람도 전문가로서 나름대로 논리가 있어 반대했겠지만 같은 여성의 입장에선 정말 섭섭했다."

'산파'로서의 고통이 남달랐던 만큼 남녀차별금지법에 대한 자부심은 각별하다. 시정명령권이 원안에서 빠진 데 대한 아쉬운 소회도 상당할 듯하지만 그는 굳이 "난 '아쉽다'는 말보다는 '다소 아쉽다'고 말한다"고 가른다. 법에 명시된 시정권고권은 단순히 미약한 권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 요지다.

"특별한 이유를 소명하지 못하는 한 권고에 응해야 하고, 상대방이 입증의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에 '준시정명령권'을 가진다고 해석을 넓힌다. 이에 더해 여성특위가 직권조사를 할 경우, 이를 방해하면 처벌도 받게 돼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간다.

여성특위원장 시절은 "70년대 여성문제 연구와 이론화 작업을 행위로 실천하는 계기를 가지게 됐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는 더 나가지 않았다. 남녀차별금지법이 제정, 공포되자마자 잔여 임기를 1년여 남겨놓고 "내가 할 일은 어느 정도 했다"며 자진사퇴했다. 마침 허리도 다시 아파오던 차였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여성 공직자로선 극히 드문 예였다.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성희롱·성차별 본격 공론화 '신호탄'

"남녀차별과 성희롱을 우리 사회에 공론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남녀차별금지법)은 1998년 12월 3일,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여성특위)가 추진한 원안을 기본으로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 159인 입법(대표발의 김원길 의원)으로 국회에 제출됐다.

총 5장 39조항으로 구성된 법의 핵심은 여성특위가 성차별 조사 권한과 조정·시정권고 권한, 그리고 고발 권한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여성특위는 피해자의 신고 혹은 직권으로 성차별 공공기관과 사업장을 조사할 수 있고, 해당기관은 자료 제출과 때에 따라 여성특위 출석의 의무가 있다.

여성특위가 권고하는 시정조치는 ▲남녀차별행위 중지 ▲원상회복 손해배상 ▲재발 방지를 위한 교육 및 대책 수립 ▲일간신문의 광고란을 통한 공표 등이었다.


위헌 판결후 폐지된 '제대군인 군가산점제'
공무원시험 남성에 일방적 특혜

'제대군인 군가산점제'는 1961년 제정된 '군사원호대상자고용법'에서의 제대군인 우선고용에서 출발, 69년 채용시험시 제대군인에 한하여 과목별 시험 득점시 만점의 3~5%를 가산하도록 규정, 시행됐다.

90년대 들어 여성학의 전파와 여성운동의 활발한 전개에 따라 이 제도의 문제점이 논의되기 시작해 97년 '제대군인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 98년 시행령을 통과시킴으로써 독립적으로 법률화됐다.

이후 98년 10월19일 7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가 군 가산점에 의해 탈락한 연세대의 남성 장애우와 5명의 이대 졸업생이 이 법률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99년 12월23일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판결이 나옴으로써 군 가산점제는 결국 폐지됐다.

덧붙이는 글 | 이은경 / 여성신문 기자·20주년 기념사업본부장

덧붙이는 글 이은경 / 여성신문 기자·20주년 기념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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