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연실 굽실거리며 ‘알겠나이다.’를 되풀이했지만 하달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면 적의 무기로부터 내가 너희들을 보호할 지언즉, 이대로 하지 않거나 정성이 부족하면 너희들을 모조리 내 곁으로 불러 오겠다!”
말을 마친 유란은 순간 신기가 나가 버리자 앞으로 푹 꼬꾸라지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런 유란을 놓아둔 채 신이 전한 의미에 대해 이리저리 논의를 해대었다. 주로 어느 집에서 기른 돼지를 잡을 것인가부터 시작하여 돼지 외에 제물로 바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활쏘기를 하던 장정들도 더 이상 훈련은 하지 않은 채 제사를 지낼 일에 대해서만 논의를 거듭했다. 하지만 하달은 그런 논의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쓰러진 유란에게 다가가 부축하여 서둘러 집으로 데리고 나갔다.
“하달님 계십니까?”
저녁 무렵이 되어서 마악이 하달의 움집을 찾았다. 하달은 그때까지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유란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하달님 내일 아침에 우선 지걸네 돼지를 잡아 해가 뜨는 방향으로 제사를 올리고 해가 중천에 뜬 뒤에는 해유네의 돼지를 잡고......”
“아닐세. 내일 제사는 우리 집 돼지만 잡아 지내도록 하지.”
“예?”
마악이 무슨 소리냐며 눈까지 치켜들며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평소의 마악이라면 하달에게 감히 취하지 못할 태도였지만 그만큼 하늘님의 계시를 하달이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놈들이 내일이라도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제사만 줄곧 지내면 어쩌겠다는 것인가? 아침에 장정들을 모아 활쏘기를 시키는 한편 창, 도끼가 손에 익도록 연습을 시키고 해가 지려할 때 제사를 올리세.”
“그러시면 아니 됩니다! 신탁을 무시하면 어떤 앙화가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마악이 크게 반발하자 하달은 크게 역정을 내었다.
“신탁은 중요시하면서 어찌 적들의 침입은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이오! 아무리 신탁이 영험하다고 해도 제대로 된 싸움한번 안 해본 우리 장정들을 지휘할 수 있는 얘기를 해주기나 했소? 내가 한번의 제사를 지내기로 한 것도 그나마 신탁을 무시하지 않은 것이니 다른 말 하지 말고 내 말을 따르시오!”
마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말씀은 불경합니다. 저야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장로들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하달은 크게 코웃음을 쳤다.
“다른 장로들? 그들이 옛 참상을 제대로 알기나 한단 말이오? 고작 신탁에만 휘둘려서 갈팡질팡 하는 이들이 무슨 장로란 말이오? 다 몰려와서 따지던지 어쩌던지 해보라고 하시오!”
마악은 물러가면서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을 흘렸다.
“이건 아닙니다......”
마악이 물라간 후에도 하달은 그대로 유란이 깨어날 때까지 지켜볼 따름이었다. 밤이 깊어져 아무도 밖에 다니지 않을 무렵에야 유란은 깨어났다.
“아버지......”
유란이 몸을 일으키자 하달은 물 한 사발을 말없이 건네어 주었다. 유란은 그 물을 받아 달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뭘 좀 먹겠느냐?”
유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누워 있거라.”
하달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움막집 밖으로 나왔다. 그날따라 유난히 조용한 밤하늘 아래, 움막집 안에서 유란이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마악의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하달은 유란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게냐.”
하달의 눈앞에서 별똥별 하나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달은 혼잣말 같은 소리를 계속 중얼거렸다.
“네 할애비의 목소리를 하늘님의 목소리라 하면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러고도 네가 진정 신탁을 말하는 무녀란 말이냐. 난 항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쳐 이 마을을 지킬 것이니라.”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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