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항쟁'은 틀리고 '민주화운동'이 맞다?

5. 18 계기 수업에 대한 교육부의 '생뚱맞은' 지침 하달

등록 2007.05.17 09:56수정 2007.05.1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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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민중항쟁'은 틀리고 '민주화운동'은 맞다는데, 망월동 5.18 국립묘지엔 뭐라고 써 있을까요? 사진은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열린 이철규 열사 15주기 추모제 장면.

'민중항쟁'은 틀리고 '민주화운동'은 맞다는데, 망월동 5.18 국립묘지엔 뭐라고 써 있을까요? 사진은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서 열린 이철규 열사 15주기 추모제 장면. ⓒ 안현주

출근하자마자 어처구니없는 공문 하나를 넘겨받았습니다. 교육부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마련한 '5·18 계기 수업안'과 관련하여 교육지침을 하달한 것입니다. 공강 시간에 짬을 내 전교조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료를 훑어보니 특별하달 것 별로 없는 '그렇고 그런' 수업안일 뿐이었습니다.

5·18 기념재단이 제작한 리플렛 자료와 슬라이드, 비디오 등 여러 선생님들이 만든 기존의 수업 공유 자료 등이 올라와 있고, 범교과 차원 민주시민교육의 일환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 주간에 수업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수업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들이라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교육부의 어처구니 없는 공문

그런데, 교육부에서는 정작 이 수업안의 일부 내용, 그것도 용어 몇 글자를 '부적절'하다며 문제 삼고 있습니다. 내용인즉 교과서의 공식 용어가 아닌 '5·18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과 '계획된 학살' 등과 같이 근거 없는 사실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긴 교과서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달력에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적고 있긴 합니다. 어쨌든 '주의'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학습 과정에서 혼란을 초래하고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자상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기실 시의성이 있는 역사 수업에 있어서 용어의 사용 문제는 교육부의 우려대로 학습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기보다는 학습의 범위를 넓혀주고 생각의 깊이를 키워 다양한 시각을 갖게 하는 유용한 학습 도구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민주화운동'은 어떤 개념이고, '민중항쟁'은 또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는지를 아이들과 교사가 함께 호기심을 갖고 캐물어가다 보면 파란만장했던 우리 현대사를 바라보는 훨씬 더 폭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 교육의 본령이 '우리 자신과 오늘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또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중학교 국사 교과서 머리말에서 발췌)'하는 것이라면, 더구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외려 권장할 만한 것임에도 공문까지 내려 입을 막고 있음은 무척 생뚱맞습니다.

"민중항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 냄새가 나요!"


공문을 만지작거리면서 지금껏 아이들 앞에서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을 두루 섞어 써왔던 까닭에 살짝 두렵기도 했지만, 정작 아이들은 그 두 용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느끼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민중항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 냄새가 나요!"

이 말에 적잖이 놀랐고, 수업의 좋은 소재일 수 있겠다 싶어 칠판 위에 민중·대중·국민·시민·인민·백성 등과 같은 '비슷한 듯 하면서도 사뭇 다른' 용어를 적어두고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연스럽게 말해보도록 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민중과 인민이라는 말을 무척 낯설게 느낀 반면에 국민과 시민을 가장 '올바른' 용어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민중과 인민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쓰는 용어이니 우리나라에서는 써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며 되묻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대략난감(?) 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였던 수많은 용어들이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이 '공산주의'를 떠올리게 된다는 민중과 인민도 그렇고, '노동'은 '근로'로, '동무'는 '친구'로, '해방'은 '광복'으로 대체(?)된 것도 그렇습니다. 기실 이런 용어가 살아남았더라면 우리의 말과 글이 훨씬 더 다채로워졌을 텐데도 말입니다.

현직 교사들에게는 '추상과 같은' 공문이 고작 이 정도인가 싶어 그저 헛웃음이 나오지만, 입만 열면 공무원과 교사들은 '중립적'이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는 현실에서 여느 학자의 말마따나 '교육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정치적'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힘겹게 용어수업(?)을 마무리하려는데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선생님, 엊그제 아빠, 엄마랑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다녀왔는데요. 묘지 한 가운데 우뚝 솟은 탑에 '5·18 광주민중항쟁 추모탑'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던데, 그거 '오타'인 셈이네요."

덧붙이는 글 | 이 정도쯤은 교사의 재량에 맡겨둘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미주알고주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육부의 공문은 외려 교사의 수업 의욕을 꺾어버릴 우려가 있습니다.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정도쯤은 교사의 재량에 맡겨둘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은데, 미주알고주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교육부의 공문은 외려 교사의 수업 의욕을 꺾어버릴 우려가 있습니다.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5·18 #전교조 #교육부 #민중항쟁 #민주화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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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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