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17일 오전 경의선 문산역과 동해선 금강산역에서 각각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 공식 기념행사를 열고 오전 11시30분 북측 개성역과 남측 제진역을 향한 열차를 동시에 운행했다. 사진은 56년 만에 경의선이 문산역에서 출발하는 모습.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개성=공동취재단, 김태경 기자]
"어디가 군사분계선이지?"
17일 시험운행에 나선 남측 열차가 낮 12시 10분 도라산역을 떠난 지 몇 분이 지났다. 임진강 철교를 지난 뒤 주변의 모습은 너무나 평화스러웠다.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고 있었고 새들은 한가롭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런 정적을 깨는 것은 열차의 움직이는 소리밖에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4호차에 타고 있던 누군가가 "아 이제 넘었다"라고 말했고 몇몇 탑승객들이 박수를 쳤다. 시계를 쳐다보니 12시 18분. 그러나 4호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진짜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인지 긴가민가했다.
당시 열차의 왼쪽 창문 바깥 쪽으로 보이는 도로 가에 '개성'이라고 쓰인 대형 철제 도로 표지판이 서 있었다. 밑에는 '개성공업지구 5㎞'라는 작은 표지판도 있었다. 그런데 그 철제 도로 표지판은 남쪽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 넘었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여기가 남쪽 땅인지 북쪽 땅인지 순간적으로 헛갈렸다.
이렇게 상당히 허탈(?)하게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철조망도, '지뢰지대' 같은 표시도 없었다. 그렇다고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북의 지형이 다른 것도 아니었다. 풀 색깔도 똑같았고 나무 모습도 비슷했다.
지도상으로만 그어진 이 선이 50여년 동안 민족의 허리를 두동강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이없었다.
군사 분계선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않아 창밖으로 북측 군인과 일부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12시 30분 북측 판문역에 도착했고 북측 통관 요원이 열차에 타 간단히 통관 수속을 했다. 그제서야 북측 땅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이렇게 철마는 아주 간단하게 민족의 혈맥을 이었다. 그런데 이게 56년이나 걸렸다니….
북측 주민들 박수는 없었지만 관심은 높아
분단 뒤 남북 철도 연결에 대해 처음 언급된 것은 지난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다. 그로부터 무려 16년이나 지났다. 김상근 민주평통부의장은 "오늘 열차 시험 운행은 (지난 16년 동안) 우리 국민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국민들의 열망은 열차시험 운행 현장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문산역 행사장 밖의 건물 옥상에는 구경나온 시민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열차가 오전 11시 29분 문산역을 벗어나 북쪽으로 달리는 도중 바로 옆 도로가에는 많은 시민들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실향민인지 알 수 없으나 나이든 분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철길 옆 도로를 달리던 차량 안에서도 손을 흔들었고, 시속 20㎞미만으로 달리는 열차 속도에 맞춰 따라오는 승용차도 있었다. 임진각 전망대도 열차 시험운행을 구경 온 시민들로 가득 찼다.
남측은 이번 열차 시험 운행이 결국 TKR(한반도 종단철도)과 TSR(시베리아 횡단철도) 연결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면서 큰 정치적·경제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북측은 '시험' 운행이며, 단순한 기술적 연결로 의미를 축소했다. 취재진의 질문에 이재정 장관은 열심히 답했지만, 북측 권호웅 단장은 거의 응하지 않았다.
경의선 열차가 떠날 때, 그리고 북측 기관차가 남측 제진역에 들어올 때 우리 국민들은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러나 우리 기관차가 개성역에 도착했을 때 120명 정도의 남녀 고등학생들이 환영 나온 것에 그쳤다. 개성 시내로 들어오는 경의선 열차에 북측 주민들이 박수를 치거나 손을 흔드는 모습도 없었다.
그러나 북측 주민들의 관심이 상당하다는 것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개성 시내에 열차가 들어설 때 많은 주민들이 가던 길을 멈춰서거나 타고 가던 자전거에서 내려서 남측 열차를 유심히 쳐다봤다. 학교로 추정되는 건물에는 유리창은 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창가에 빼곡하게 붙어서 구경하는 모습도 보였다.
▲56년 만에 남북을 잇는 남북철도연결구간 시험운행열차가 17일 오후 도라산역을 출발해 남측통문을 지나고 있다.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정택용
리영희 "이제 남북도 군사분계선을 넘는다는 의식이 없이 다녀야"
지난 1980년대 중반까지 북한의 국력이 남한보다 앞서거나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남북관계에서 공세를 펴는 쪽은 북한이었다. 남쪽 정권은 여러 가지 문제로 사실 수세적인 자세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남한의 국력이 북한을 월등하게 앞서고, 특히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 남한이 공세적이었고 북한은 수세적으로 변했다.
항상 "조국통일",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는 북한이 이번 열차시험운행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도 이런 상황의 반영이다. 이런 북한을 어떻게 잘 다룰 수 있을 것인가는 결국 우리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날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의 많은 소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발언은 리영희 선생의 것이다. 평안북도 삭주가 고향인 리 선생은 중학교 1~4학년 때 서울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리 선생은 방학 때면 경의선을 이용해 고향으로 갔다.
"나도 모르게 열차가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군사분계선이 얼마나 평화스러운지 군사분계선이라는 감이 없었다. 유럽에 가보면 10개국의 국경을 넘어도 국경을 넘는지도 모르게 넘는다. 남북도 이제 군사분계선을 넘는다는 의식이 없이 다녀야 한다. 오늘 열차 시험운행이 그 시발점이 될 수 있도록, 그런 상황이 올 수 있도록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한다."
| | 분계선 지나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 | | [동해선 시승기] 터져 나온 박수와 함께 군사분계선 넘다 | | | | [동해선 공동취재단] 17일 오전 11시 25분, 열차에 오르라는 북측 승무원의 재촉에 승강장에서 환담을 나누던 남북 인사들이 객차에 탑승했다.
열차의 외관은 현대식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초록색 몸체에 지붕은 옅은 회색 페인트칠이 돼있어 조악한 모습이었다. 탑승하자마자 최근 칠을 새로 한 듯 냄새가 코를 찔렀다. 2호차에 들어서자 정면으로 보이는 맞은편 출입구에 김일성·김정일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객차는 북측 인사와 남측인사가 마주보게 배치됐다. 객석은 서로 마주보게 고정돼있다. 자리를 뒤로 젖힐 수는 없었다.
오전 11시 27분, '뿌우우~' 기적소리가 울렸다. 열차가 앞뒤로 서너차례 덜컹거리다가 서서히 출발했다. 열차는 시속 10㎞ 정도의 속력으로 역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역 주변의 북한 주민들은 일손을 놓고 열차가 역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손을 흔드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열차에서는 평양봉사대에서 나온 여성 봉사단원들이 좌석을 오가며 밝은 얼굴로 음료 서비스 등을 하기 시작했다. 한 승객이 "직함을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라고 묻자 그냥 "잠시만요"하고 지나쳤다.
기차는 오전 11시 50분쯤 삼일포역을 지났다. 출발지인 금강산역과 마찬가지로 역 이름은 작게 붙어있고 정면으로 커다란 김일성 주석의 사진과 양 옆으로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 만세',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 만세'라는 글귀가 붙어있었다.
열차는 남측이 상판제작을 해 복구됐다는 남강1교 다리를 통해 남강을 건너갔다. 삼일포역을 지나나 북한의 명승지인 삼일포와 해금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열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감호역이었다. 북측의 마지막 분계역으로 통해 세관검사가 이뤄지는 곳이다. 11시 55분. 금강산에서 감호역까지 15㎞가량 되는데 30분 걸렸으니 평균 시속 30㎞로 달린 셈이다.
낮 12시께 군복 차림의 세관원과 역무원 2명이 칸마다 탑승했다. 그중 한 명이 "첫 열차 운행의 승객이 된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통관 및 세관 검사를 실시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검사를 시작했다. 사진이 첨부된 명단과 본인을 대조하는 과정이다.
특히 디지털카메라 검사를 철저히 했다. 차창 밖으로 북측 지역이나 군인 등 사진을 촬영했는지 일일이 검색하고, 혹시 찍힌 사진은 지우도록 했다. 이 때문에 통관 검사에 시간이 꽤 소요됐다.
이들 통관원들이 객차의 중간쯤 갔을 때가 낮 12시 15분. 예정된 군사분계선 통과 일정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상부 선에서 '빨리 진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들은 끝내 막판 검사를 포기하고 열차에서 하차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기적소리. 그와 거의 동시에 열차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 출발할 때보다 두 배는 커진 듯 했다. 흔들림이 약간 심해졌지만 선반 위의 음료수 병이 넘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속도를 냄과 동시에 기적소리의 빈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5분 뒤 북한 측 남방한계선을 통과. 이후 비무장지대(DMZ)에 들어섰고, 낮 12시 21분 역사적인 군사분계선을 통과했다.
객차 내에선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계선을 지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속도가 줄면서 열차도 조용해졌다.
주변 경관이 비슷해 남인지 북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60', '20' 속도가 적혀있는 이정표 등 남쪽 영토임을 실감케 하는 사물들이 눈에 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널찍한 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동해선 열차시험운행의 종착역인 제진역에 도착한 것. 이때가 낮 12시 34분이었다. 요란한 고적대 음악소리와 한반도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면서 반세기 만에 남북을 달리는 역사적 순간에 있었음을 새삼 자각하게 됐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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