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이 마을 위령탑에 빼곡하게 새겨진 희생자 명단.김효성
호지에우 할아버지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학살지가 있으며 거기서도 단 2명이 살아남았다며, 원한다면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차를 타고 2㎞ 떨어진 다른 마을에 도착해 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베트남 정부 공식 기록에는 사건 당일이 1966년 2월 23일로 기재돼 있으며, '쯩진 할아버지의 마당'이 학살 장소로 기록된 지역이었다. 고자이 마을과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같은 떠이빈싸의 '빈안'에 속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엄연히 다른 마을이었다. 이 곳에서는 모두 90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쩐남(82) 할아버지는 방공호에 숨어있던 20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한국군이 탐지견으로 수색해 방공호를 쉽게 발견했고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지만, 할아버지는 방공호 안에 홀로 숨어 있었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한국군은 방공호 안을 다시 확인하지 않았고 끌려간 나머지 19명은 살해당했다고 한다.
"우리 빈안 지역에서 학살은 전부 3군데에서 일어났어요. 첫번째는 호지에우 할아버지가 사는 고자이 마을이고, 두번째는 내가 사는 이 마을, 그리고 세번째는 우리 마을 외곽 변두리에서 일어났지.
남조선 군대는 그날(할아버지는 음력 3월 11일로 기억하고 있었으나 정부 공식 자료에는 양력 2월 23일로 기록됨, 양력과 음력을 병용하는 데서 오는 오류인 듯함)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여기로 와서 사람들을 죽였어. 여기서만 90명이 죽었지. 그런데 이상한 건 그해 음력 1월 22일과 2월 5일에도 남조선 군대가 마을에 들어왔어. 하지만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고 포탄으로만 공격했지."
한국군은 시체들을 태우고 유유히 사라졌고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이 대부분 죽었으니 유가족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썩은 시체를 짐승들이 뜯어먹는 지옥같은 광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또한 당시 생존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기에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다.
"슬픈 과거일 뿐... 한국사람 원망하지 않아"
두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혹여나 아직까지 원망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러나 두 할아버지의 말씀은 의외였다.
"슬픈 과거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슬픈 과거는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희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요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네. 한국에서 우리 마을에 학교나 병원을 세우고 지원하는 모습을 보니, 큰 원망도 조금씩 사그라지더군. 한국 사람을 더 이상 원망하고 있지 않다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빈딩성 떠이선현에 중형 규모의 병원을 건설하고 있고, 고자이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떠이안 초등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대 베트남 개발원조를 대부분 전쟁 피해가 크고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베트남 중부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두 생존 할아버지들과 인사하고 나오는 길에, 지금까지 묵묵히 계셨던 또 다른 생존 할아버지가 나무가 우겨진 모퉁이를 가리키며, 가족들이 저기 숨어있다가 방공호를 덮었던 볏짚에 불이 붙는 바람에 모조리 타 죽었다고 말했다. 그 슬픈 장소를 곁에 두고 40여년을 살아오셨던 분들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차를 타고 다시 고자이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호지에우 할아버지가 내 손을 말없이 잡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푸석한 손끝에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이해가 담긴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정부, 민간인 학살 공식 사과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