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 폭동과 민주화운동의 차이

등록 2007.05.18 18:02수정 2007.05.1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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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앞에 사과가 있다고 하자. 사과는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기 이전에 존재해왔다. 따라서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존재하는 사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다. 즉 우리가 사과를 사과라고 하기 전에 감자, 배라고 불러도, 실존하고 있는 사과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학, 기호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부르고 있는 '사과'라는 것은 기표(記表. signifiant)이며, '사과'라는 '기표'가 지시하고 의미하는 실제 사과는 기의(記意. signifié)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 기호학의 창시자, 구조주의의 원류 등 많은 수식어를 가진 스위스의 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Saussure, 1857-1913)는 언어를 말(言)의 외적 형식인 기표와 말의 의미인 기의의 결합을 '언어'라고 보았다. 따라서 언어(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합쳐져 있기에 항상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소쉬르는 '대상이 관점보다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고 말했다. 즉 언어가 세상에 존재하는 실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활동'으로서의 언어가 세상을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말하는 언어에는 사회적, 역사적 의미 또는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빨갱이'는 논란의 중심언어였고, 배제의 기준이 되었다. 해방 이후 좌우간 극렬한 이념적 대립, 6.25전쟁과 분단은 우리 사회와 정치의 언어를 '냉전반공주의'라는 획일적 틀 속에 가두어놓아 버렸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외치고 민족을 외쳐도 그 목소리가 냉전반공주의에 맞지 않으면 빨갱이, 친북세력이라는 언어로 규정되고, 우리사회에서 배제되었다.

단순한 레토릭(rhetoric)의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상징과 담론은 특정 정치체제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고 권력 및 생산적 자원의 분배양식을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매개역할을 담당한다. 한 집단(지배계급)이 물리적 힘의 위력만이 아니라 관념과 제도, 사회관계 등에서의 동의를 통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빨갱이는 우리 국민이 피해하고 배척해야 할 당연한 대상이며, 배제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80년 광주(호남)는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현대사의 오점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였던 1980년 5월 광주. 1980년 5월이라는 동일한 시간, 광주라는 동일한 장소, 광주시민과 군부대, 전두환 등 집권세력이라는 동일한 인물 그러나 1980년 5월의 광주를 가리키는 이름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광주(소요)사태, 폭동, 민중봉기, 내란상황, 광주민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그러나 소요사태, 폭동과 민주항쟁, 민주화운동이 가진 언어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는 천지차이다. 광주사태, 폭동이라는 언어는 광주를 혼란과 무질서로 규정하면서 한국 전체를 공포분위기로 조성하고, 당시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기재로서 작용하였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사실로서 존재하고, 그 속에서 희생당한 시민과 억압한 군부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광주를 표현하는 '기표'는 '빨갱이'라는 '기의'로서 우리 국민에게 각인되고 신군부 등 지배계층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했던 것이다.


19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1988년 '5공 청문회' 이후 정치권과 학계 등의 논의와 평가를 통해 '광주'는 역사적으로 당당히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등이 제정된 것도 광주라는 역사적 사실과 증거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융합된 결과라 말할 수 있다. 광주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념의 틀, 언어가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는 소쉬르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올해로 27주년을 맞이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현대사의 오점이면서도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이며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1980년 광주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5ㆍ18기념재단이 1500명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최근 설문조사에서 10.2%는 1980년 광주를 '폭동'으로, 6.7%는 '사태'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70% 넘는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이나 '민중항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폭동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우리는 1919년 한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외친 3.1 운동을 폭동이나 폭거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지배를 정당화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자 않는다. 헌법과 민주적 질서를 파괴한 이들에 맞서 싸운 광주시민을 어떻게 평가하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5월 18일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광주 #광주사태 #광주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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