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만에 우연히 다시 찾은 박달재

누님 결혼식에 못 가봐 생긴 아쉬움은 사라지고

등록 2007.05.19 19:07수정 2007.05.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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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또렷이 새겨진 것이 있다면, 그 기억은 인생에 큰 상처가 되는 일이거나 가슴에 큰 회환을 남길 만큼 유별난 것일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만한 일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상당히 아쉬웠던 일이 나에게도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러한 기억은 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포항에서 군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더 지났을 때쯤 고향에서 반가운 전갈이 왔었습니다. 혼기가 지났다고 걱정하던 큰 누님이 결혼한다는. 하지만 당시 결혼하는 큰 누이의 결혼 소식을 마냥 반길 수 없었던 것은 한미연합 팀 스프리트 훈련이 시작되어 특별휴가는커녕 외출조차 신청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누이가 결혼하던 날 우리 부대는 미군과의 연합훈련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 포항제철에서 통일호를 타고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 제천 의림지를 향하였습니다. 부대를 벗어나 고향인 제주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 안에서 마음은 마냥 고향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속내를 드러내 말하지 못하고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괜찮나? 누님 결혼한다는데 못 가 봐서."
"네, 괜찮습니다."
"미안하다."


대대장이었습니다. 누님의 결혼 소식에 대해 누구에게도 휴가를 보내 달라고 했던 기억이 없는데, 어찌 알았는지 휴가를 보내주지 못해 아쉬워하며 위로의 말을 던져 준 대대장의 배려에 고마웠습니다. 부대원들의 사소한 일까지 챙겼던 당시 대대장은 지금 해병대 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한 달 동안의 훈련은 의림지를 지나 울고 넘는다는 박달재까지 무거운 군장을 지고 타박타박 올라가서는, 숲이 우거져 나뭇잎에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산길을 따라 다시 내려오며 야영을 하는 등의 일정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박달재를 오르내리는 한 달 내내 '울고 넘는 박달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물~항라 저고리'를 흥얼거렸습니다.

그 의림지와 박달재를 19년만에 우연하게 다시 찾을 기회를 얻어 제천을 방문했습니다.

충북 제천에 있는 송학중학교에서 (사)한국해외봉사단연합회에서 실시하는 '다문화이해를 위한 국제협력 이해 특강'을 신청하여 강의를 나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송학중이 위치한 곳이 의림지나 박달재와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강의하러 내려가는 길 이정표에서 '아!'하며 19년 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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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이해를 위한 국제협력 이해 특강 모습 ⓒ 송학중

송학중은 '송학'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 예전에는 사람보다 '학'과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송학에서는 고고한 자태의 학을 간간히 볼 수 있다고 담당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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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락 아래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는 송학중 ⓒ 고기복

아닌 게 아니라, 강의를 들어가기에 앞서 학교 앞 개천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는 학 한 마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개천 앞 도로에는 면사무소까지 연결되는 도로 건설을 위해 작업하는 인부들이 있었고 논에는 트랙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하게 개천을 노니는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오랜 세월 터줏대감으로 살아왔을 학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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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이어 온 송학의 주인이라는듯 자태를 뽐내는 학의 모습 ⓒ 고기복

전교생이라고 해 봐야 110명밖에 안 되는 소규모 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19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군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시린 가슴으로 지나쳤던 박달재와 의림지를 이제는 여유를 갖고 둘러볼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감사한 마음과 추억의 한켠을 들추며 한 컷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누님 결혼식에 참석 못해 생겼던 아쉬움은 사라지고 어느덧 고향 같은 정겨움이 묻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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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최초의 저수지 의림지로 그 기원은 벼농사가 시작된 삼한시기부터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 고기복

#박달재 #의림지 #군대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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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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