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07회

등록 2007.06.04 08:16수정 2007.06.04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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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는 그 시각 운중각에 있었다. 운중보는 점점 험악해지며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것을 멈출 사람을 보주인 운중 밖에 없다.

"정말 다 죽일 셈인가?"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끝내기 전까지는 아무 내색도 비치지 않고 그저 노인네들이 모이면 하는 과거의 기억들을 끄집어냈을 뿐이었다. 과거 그 당시에는 그것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을 뿐인 그런 기억들….

그리고 식사가 끝나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중의가 꺼낸 말이었다. 어찌 보면 매우 뜬금없는 말이었다. 보주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지금 누구를 죽이려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있단 말인가?"

"어젯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네. 자네의 회갑연에 참석하러 온 사람들이 말일세."

보주는 차를 입안에서 음미하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내가 어찌해야 할까? 그들보고 싸우지 말라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정을 해야 하나? 이미 운중보는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되었네. 그래도 허울뿐인 보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자네는 이제 나보고 책임지라는 것인가?"

"……!"


중의는 보주를 유심히 살폈다. 정말 이 친구는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가?

"어차피 그들은 이 운중보를 차지하려 들어왔네. 나는 허울뿐인 보주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이곳을 떠나면 그만이네. 그런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이고, 어떻게 책임지란 말인가?"

중의는 내심 당황했다. 운중은 철저하게 시침을 떼고 있다. 나이가 먹으면서 성격도 변한 것일까? 운중은 최소한 친구들에게까지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속이는 것보다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좀 더 솔직해 보면 어떤가?"

중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내친 김에 갈 데까지 가야 한다.

"무엇을 말인가? 그러고 보니…?"

보주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제야 중의가 물은 내용을 파악했던 모양이었다.

"지금 자네는 이 운중보의 상황이 내가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바로 그거네. 이런 일을 만들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많지 않네. 더구나 이렇듯 완벽하게 진행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란 생각이네."

중의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보주의 얼굴에 어이없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얼굴을 침중하게 굳히고는 말했다.

"자네… 많이 변했군.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 변하게 했는가? 이 나이 들어서도… 권력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지 않던가? 아니 그렇게 더욱 더 강렬해지던가?"

"자네의 복수심 때문인가? 평생을 회에 이용당했다는 자괴감과 증오로 지금 모두 죽일 생각을 한 것인가?"

대화가 아니었다. 대화란 주고받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니지… 물론 자네를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겠지. 자네로 하여금 절대 권력에 목을 매달게 만든 것은 결국 자네가 아니라 자네의 아들 때문이겠지."

"……!"

중의의 얼굴에 당황스런 빛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말문이 막히며 얼굴이 시뻘게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이 세상에 단 세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그것을 어찌 운중이 알았을까?

"자네…는…알…고…있었나?"

시인이었다. 이미 자신의 아들 때문이란 사실을 말한 다음에는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칠년 전에… 그 아이가 추씨가 아니고 공손(公孫)씨라고 알게 되었지. 그나마 혈간을 제외하고는 피붙이 하나 없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겨진 아이라 매우 조심스러웠네."

"어찌… 알게 되었…나?"

"자네 입을 통해서였네. 칠년 전 춘절(春節)에 자네는 이곳에 들른 적이 있네. 그 때 무슨 영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자네는 많이 취했고… 잡히면 참형을 당할 말을 흘리더군. 그 때는 이상했지만 확실히 안 것은 아니었다네. 북경의 포가장(鮑家莊)의 안주인이 추태감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리고 추태감은 추교학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환관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이리저리 맞추어보니 답이 나오더군."

"으음……."

"왜 추태감이 그리도 자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자네가 왜 북경에 포가장을 고집하고 있었는지도 이해가 되더군.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친구들의 혈육만큼은 존재하지 않도록 노력했는지도…."

중의의 얼굴은 더욱 더 시뻘겋게 변하다가 결국은 검붉은 색깔을 띠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운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내색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자네는 이번에… 모두를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군. 들어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모두 끌어들여놓고는…."

예상은 맞았다. 회의 중요인물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이곳을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운중만이 충분한 동기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네는 또 잘못 생각하고 있군. 나는 그런 의도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네. 굳이 사양하는데도 철담이 회갑연을 열어야 한다고 하더군. 내가 떠날 구실을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말이야."

같이 지내오면서 철담은 언제나 친구인 운중에게 미안해했다. 실제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면서 실제적인 주인이 자신임에도 언제나 친구인 운중 앞에서는 조심하고 양보했다. 운중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냥 운중보를 떠나게 해주는 것이 친구를 위한 길임을 알고 있었지만 회를 위해 붙잡아두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미안해했다.

그래서 이미 늦었지만 이번 기회에 친구를 놓아주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친구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진심인가?"

중의는 믿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는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운중이 있을 것이란 확신을 버리지 못했다.

"믿지 않는 것은 자네 마음이지. 하지만 철담 그 친구의 바램도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 어쩌면 나는 살아서 운중보를 나가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천룡의 후예가 이곳에 왔기 때문인가? 왜 자네는 이십칠 년 전에 그리도 어리석은 짓을 했던 것인가?"

능효봉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회로부터 그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팔 개월 동안이나 데리고 다닌 일을 지적한 것이었다.

"알고 있었나? 아주 뜻밖이로군. 그 때나 지금이나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나는 구룡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네. 아니 대명(大命)의 황실과 백성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진 셈이지. 만약 구룡이 지금껏 살아 있었다면 동림당의 많은 유생들과 학자들도 아직 건재해 있었을 것이네. 나라꼴이 이 모양 이 꼴로 변하지는 않았겠지."

왜 운중이 이곳에 처박혀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케 하는 말이었다. 단지 회가 두려워서도 처자식의 죽음으로 의지가 상실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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