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야 여기쯤에서 쉬어 가자꾸나.”
화안공주는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말에서 내려 앞서가던 고도를 불러 세웠다. 고도는 조용히 말에서 내려 화안공주를 등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부여를 떠난 지 벌써 7일이 지났지만 서라벌로 가는 길은 틈만 나면 쉬어가자는 화안공주로 인해 더디기만 했다.
“고도야.”
“예”
고도는 화안공주에게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무엄한 행동이었지만 주위의 다른 수행원들은 물론 화안공주도 이를 탓하지 않았다.
“노래를 불러다오.”
고도는 허리춤에 찬 짧은 칼을 풀러 땅바닥을 탁탁 치며 길게 가락을 뽑아내었다.
-가지 가지 너울대는 아름다운 매화는 죽죽 뻗어 휘어졌구나.
여러 번 듣는 노래였지만 화안공주는 그 노랫가락에 벌서 도취되어 눈을 감고 있었다. 화안공주를 둘러싼 수행원들도 고도의 노랫소리에 피곤함이 싹 가시는 듯했다.
-그 매화 꺾어 담으면 이 병하나 가득 되겠구나. / 그 잎 펴서 가지 가지 죽죽 벌려 / 하늘하늘 담아 이 꽃병 가득 그대에게 드리오나. / 꺾어 꼽은 매화가지 시들어 가는구나.
고도의 기나긴 노랫소리가 끝나자 수행원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화안공수도 말에 올랐다. 그들에게는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쉬어갈 때는 물론 잠시 쉬어 갈 때도 늘 있는 일이었다.
‘공주님!’
고도는 자신의 뒤에서 따라오는 공주를 몇 번이라도 돌아보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 참았다. 화안공주가 몇 번이고 멈춰 서서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고도에게는 형벌과도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공주가 고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한 가닥 남은 희망으로도 여겨지기도 했다.
지난 날, 사비성에서 고도는 수시로 공주의 처소를 배회하며 그 노래를 불러대었다. 어쩌면 공주가 그 노랫소리에 반해 자신을 받아드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고도는 남부여 6좌평 중 한명인 내신좌평 고슬여의 셋째 아들이었기에 화안공주를 연모하는 것이 결코 격에 맞지 않는 행위는 아니었지만, 그런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자 행동이 너무 무례하고 지나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이런 사사로운 말은 어전에서 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왕은 어전회의에서 고슬여를 지목해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그대의 아들을 잘 단속해 주었으면 하오.”
고슬여는 무슨 일인지 되묻지 않고 깊이 고개를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고슬여의 귀에까지 고도의 행동이 전해졌기에 왕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고 여길 뿐이었다.
“얘야. 굳이 네가 공주를 사모한다면 어떻게 줄을 놓겠지만.”
고슬여는 아들 고도를 불러놓고 대뜸 꾸짖기 보다는 달래어보았다.
“치기 어린 행동은 그만 두어라. 애비가 곤란하지 않느냐.”
고도는 단호히 대답했다.
“전 진정 화안공주를 사모합니다. 아버지께 누가 되는 일이라면 모르겠으나 제가 부마(駙馬 : 왕의 사위)가 된다는 건 좌평인 아버님께 결코 누가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쯧! 맹랑한 놈….”
고슬여는 곁으로는 혀를 찼으나 결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사방에서 말이 오르내리면 공주가 불쾌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냐. 내 심정을 이해해 힘써 보겠으니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조심하거라.”
“예 아버님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도는 자신있게 말을 던지고 물러났지만 화안공주를 향한 연정을 표현하는 행동을 그만 둘 의사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왕이 고도의 행동에 대해 고슬여에게 주의를 준 것은 다른 이유에서임을 그때 두 부자는 알지 못했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