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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박찬욱의 몽타주> 겉그림. ⓒ 마음산책
"여기 내가 쓰고 싶어 쓴 글은 하나도 없다. <공동경비구역JSA> 개봉 이전에는 돈을 벌려고, 이후에는 청탁을 거절 못 해서 썼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썼다는 뜻은 아니다.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어차피 맡은 일이라면 열심히 해야지. 마치 내가 스스로 쓰고 싶어 안달이 나서 쓰듯이 썼다. 그래야 즐거울 수 있으니까. 즐거워야 빨리 끝나니까. 빨리 끝내야 내 시나리오를 쓸 수 있으니까. 그런 맘으로 쓰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고는 했다." - <박찬욱의 몽타주> 서문 중에서
영화감독 박찬욱은 사실, 유명 영화감독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글을 써서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영화 평론가로 일하며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해설을 맡기도 했다.
데뷔작 <달은…해가 꾸는 꿈>부터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까지, 자신이 감독했던 모든 영화의 각본을 직접 쓴 박찬욱의 필력은 그의 연출 실력만큼이나 세련됐다.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만 살아남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고 있자면 절로 질투가 난다. 박찬욱의 친동생인 찬경씨 역시 미술작가로 일하며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바 있는데, 이런 점에서 볼 때 박찬욱의 예술적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하다.
기억에 남는 류승완 감독에 관한 에피소드
박찬욱의 반짝이는 재능은 꾸준한 독서와 영화보기로 더욱 다져졌고,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박찬욱의 몽타주>는 그동안 박찬욱이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을 묶어 낸 책이다.
그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비롯해 영화 제작 일지, 셀프 인터뷰 등이 실려 있는 이 책은 웬만한 만화책보다 재미있고 또 유쾌하다.
박찬욱의 글 솜씨가 얼마나 유려한지, 나는 책을 읽으며 활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책에 실린 여러 글 중 류승완 감독에 관한 에피소드는 두고두고 읽어도 배꼽을 잡을 만하다.
"승범의 형 승완이, 거지의 발싸개와 상당히 닮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가 하도 힘들어 대학을 가려고 했을 때 내가 결사반대했던 일은 그와 10년을 사귀어오는 중 내가 유일하게 잘한 일로 기억되는데, 7년 후 그가 여중생 압사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삭발을 하자고 제의해올 줄은 또 몰랐다. 내 상식에 그런 일은 대개 학생운동 물을 조금이라도 먹어본 사람이 하는 거였으니까. 그러더니 그 얼마 후에는 친구한테서 선물 받은 털모자를 한참 쓰고다니다가 그게 미제였다는 사실을 알고 기겁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친구가 국산 맞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죠. 걔 전문대 나왔잖아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그녀의 저서 <사람 vs 사람>에서 박찬욱의 심리를 분석하며, "박찬욱은 일반적인 사람의 평균치보다 더 'low self-esteem(낮은 자존감)' 쪽이다"라고 말했다.
데뷔작 연출 후 5년간 백수로 지낸 시절의 무기력감과 초대형 흥행작 를 만들고 난 후에 찍은 작품 <복수는 나의 것>의 처절한 흥행 실패 때문에 그런 심리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박찬욱 역시 2004년 9월 성균관대 강연에서 "초창기 만들었던 영화의 실패로 공포를 갖게 됐다"면서 "나이가 들어 아무도 나에게 일을 주지 않을 때 초저예산 영화 하나는 만들 수 있도록,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CF도 그래서 나갔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의 불안감이 엿보이는 발언이다.
박찬욱 감독 정도의 위치라면 앞으로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싶기도 하고, 돈 때문에 굳이 CF에 출연해야 할까 의아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러한 박찬욱의 심리는 커다란 자신감 뒤에 붙어있는 일말의 걱정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찬욱은 기본적으로 영화에 미쳐있는 사람이며, 초기작 두 편이 망했을 때에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근 십 년을 버틴 사람이다.
정혜신 박사의 분석처럼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과연 좌절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낮은 자존감'처럼 보이는 겸손함을 겸비하고 있을 뿐, 박찬욱은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유머러스하고 생각 있는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본다.
책을 읽고 너무 좌절하지 마시길...
박찬욱의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책까지 읽게 된다면 콤플렉스가 없었던 사람이라도 괜스레 우울해질지 모른다. 아주대학교 공대 학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라,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글까지 잘 쓰다니!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동안, 박찬욱의 영화 <쓰리몬스터 :컷>에서 강혜정의 손가락을 자르던 임원희의 심정이 되었다.
"요렇게 불공평한 게 시상 천지에 워딨냔 말유. 돈 많구, 미남에, 미국 유학에, 천재 감독에, 예쁜 마누라까지… 것다가 착하기까지 하면 우리 같은 놈들은 어떻게 살라는규"라고 외치던 임원희의 절규가 생각난다.
그 대사 그대로 박찬욱에게 외쳐보고 싶지만, 그래 봤자 그는 더더욱 발전할 것이 틀림없기에 시기해봤자 소용없을 것이 뻔하다. 그저 앞으로 박찬욱이 찍어낸 영화를 오래오래 볼 수 있기를, 그가 써낸 글들을 자주 접할 수 있기를 바랄 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 번 박찬욱의 책 속으로 빠져보기를 바란다. <박찬욱의 몽타주>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곱씹어 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단, 읽고 나서 너무 좌절하지 않기를 바란다. 혹시 아는가? 당신과 나에게도 박찬욱의 연출, 작가적 재능만큼이나 대단한 무엇인가가 꿈틀대고 있을지 말이다.
박찬욱의 몽타주
박찬욱 지음,
마음산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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