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300km? 그녀들의 못 이룬 꿈은?

처음 타던 KTX에서 맺은 인연... KTX를 보면 떠오르는 그녀들

등록 2007.06.12 09:18수정 2007.06.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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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300km로 달린다 이거지? 얼마나 빠를지 기대되네.'


가슴이 설랬다. 꼭 초등학교 시절 소풍가기 전날 밤, 잠을 설치던 마음이랄까. 말로만 듣던 KTX(한국고속열차)를 탄다는 생각에 가슴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서울역에 도착한 오전 10시 30분 무렵, 함께 출장을 갈 동료에게서 1시간 정도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별 수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냈다. KTX를 들여놓으며 새롭게 단장한 서울역은 휘황찬란했다. 여기저기 걸려 있는 광고물들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간혁명의 정복자 KTX"
"이제 시속 300km로 고객에게 달려가십시오"
"고객 5000만명 돌파 기념 이벤트"
"세계 1위의 유혹, XX"
"이 세상 최고의 브랜드는 당신입니다-XXXX"


철도공사와 대기업들은 마치 이곳이 꿈과 희망의 중심이라고 광고하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을 때우는데 대합실 한 쪽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여승무원 둔 시간혁명의 정복자 KTX


평상복 차림을 한 승무원들이 대합실 바닥에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하는 거지?'라는 궁금증에 그녀들 곁으로 다가가니 선전물들의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KTX 여승무원 불법파견 시정하고 전원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
"특채·회유·협박 조각나지 않고 온전하게 정규직 되자."


나는 순간적으로 '뭔가 있구나'라는 생각에 취재수첩을 들고 승무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저기 지부장님한테 여쭤보세요."

승무원들은 기자명함을 건네며 말을 붙이는 내게 선뜻 대답을 못하며 머뭇거렸다. 집회에서 나눠 준 선언문을 보니, 이들의 어색함은 곧 이해되었다. KTX 승무원들이 사람들 앞에서 공식으로 집회를 여는 게 이 날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대합실을 지나는 사람들은 진지한 호소 때문이었는지 발걸음을 멈춘 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열차 출발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나는 더 이상 집회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연사 소개를 마친 사회자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집회 내용을 물었다. 사회자 한효미씨가 민세원 지부장을 소개시켜줬다.

민 지부장은 "KTX와 새마을호에서 일하는 여승무원들은 능력 없는 자회사에 위탁된 불쌍한 신세"라며 "싼 값에 부려먹는 위탁계약을 철회하고 비정규직을 철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차 시간에 쫓기던 나와, 집회를 끌어가야 하는 지부장과의 만남은 아주 잠시 동안 이뤄졌다. 나는 두 사람의 휴대전화 번호를 물은 뒤, 전화를 걸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출장 중임에도 열차에 오른 내 머릿속은 온통 승무원들 생각뿐이었다. '카메라가 있었어야 했는데', '업무를 끝내려면 내일이나 될 텐데 기사를 어떻게 쓰지' 고민이 되었다. 그 때 통로 바로 건너편에 집회에서 보았던 여승무원 3명이 자리를 잡는 것이 보였다. 이건 취재를 마저 마치라는 하늘의 계시 같았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보네요. 어디 가시나 봐요?"
"아, 예. 대전이요.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중이에요."

나는 집회와 승무원의 대우 문제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다. 이들은 몹시 피곤했는지 속시원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곤 이내 잠에 빠진 이들은 대전역에서야 눈을 떴고, 나는 속절없이 "잘 가세요"라는 인사만을 건네야 했다.

2005년 12월 28일, 잊혀지지 않는 KTX 처음 타던 날

KTX를 처음 탈 때의 승차권이라 보관했다.
KTX를 처음 탈 때의 승차권이라 보관했다.최육상
고속열차는 씽씽~ 잘도 달렸다. 꿈의 속도 300km라더니 속도표시판에는 꾸준히 시속 290km 안팎의 숫자가 오르내렸다. 고속열차는 거짓말처럼 서울을 떠난 지 2시간 40분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나는 업무를 보는 중간 중간 민 지부장에게 수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민 지부장은 회의와 업무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 없었다며 늦은 저녁에서야 전화를 걸어왔다. 그 때는 거꾸로 내가 업무상 술을 마시고 있었기에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부산에서의 일은 다음 날 저녁에서야 끝났고, 결국 나는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쓰지 못했다.

이것은 지난 2005년 12월 28일, 처음으로 접했던 KTX와 승무원들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 날 이후, 승무원들은 내 이메일로 투쟁소식이 담긴 보도자료를 보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지난 2006년 3월 1일 파업을 시작한 뒤로 그녀들은 문화제, 촛불집회, 항의방문, 점거농성, 단식농성 등을 통해 여러 신문기사와 방송뉴스에 등장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들의 소식을 기사로 쓰지 못했다. 이미 많은 기자들이 기사를 쓰고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녀들의 첫 집회를 취재하고서 쓰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는 그녀들에게 미안하고 염치가 없어서였다.

KTX 여승무원 "우리는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승무원이 직접 써 준 전화번호가 담긴 당시 취재수첩.
승무원이 직접 써 준 전화번호가 담긴 당시 취재수첩.최육상
첫 경험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KTX도 마찬가지다. 다만, KTX는 첫 사랑과 첫 만남 같은 기분 좋은 것들과는 다르게 '미안한 첫 경험'으로 가슴 깊게 남아 있다.

지난 4월 KTX는 누적 승객 1억명을 돌파했고, 하루 이용객도 1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러한 빛나는 수치와 KTX의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수백명의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이 숱하게 쏟아낸 눈물이 있다.

KTX는 꿈의 300km를 자랑하는데, 그 KTX를 빛내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그녀들의 꿈은 왜 자랑스럽게 대접받지 못하는 것일까.

지난 2005년 12월 28일 100명 가량 되던 승무원들의 외침은 내 취재수첩에 그대로 적혀 있다. 그 외침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애석하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저 놈의 KTX만 보면 그녀들의 꿈을 전하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저 미안한 마음에 그녀들의 외침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KTX #KTX승무원 #민세원 #한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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