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판단 사람들의 순수함

<싱가포르 문화기행 32> 판단(Pandan) 잎 수공예 마을

등록 2007.06.14 10:07수정 2007.06.1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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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탄에서의 아침 해가 밝았다. 열대의 태양빛은 비스듬히 우리 가족이 자는 방에 스며들고 있었다. 날씨가 비교적 선선한 오전에는 해변과 수영장에서 딸아이와 함께 수영만 하며 푸욱 쉬었다. 오후 시간. 한낮의 자외선과 강렬한 태양에 벗은 몸을 드러내기가 겁이 났다.

파사 올레 올레. 빈탄의 여행 상품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파사 올레 올레. 빈탄의 여행 상품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노 시경
가족들과 빈탐 섬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숙소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나가 페리 터미널 옆의 파사 올레 올레(Pasar Oleh Oleh)에 나갔다. 이곳의 관광 상품 중 캄풍(Kampung) 에코투어(Eco Tour) 티켓을 사고 조금 기다리니 승합차 1대가 왔다. '에코(Eco)'라는 단어가 붙은 여행상품이니 친환경적인 여행코스일 것 같은데,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여행을 해 보면 알 것 같았다.


이 투어를 신청한 여행자는 우리 가족 3명과 프랑스에서 온 가족 4명, 총 7명뿐이었다. 여행사는 투어를 신청한 여행자들의 수에 맞추어 차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조금 있으니 조그마한 승합차가 와서 우리 앞에 섰다. 프랑스인 가족의 아빠가 워낙 거구여서 차의 중간 좌석은 그들에게 내 주고, 우리 세 식구는 차 뒤의 세 좌석에 나누어 앉았다.

빈탄은 한적하고 조용한 섬이다. 작렬하는 열대의 태양 아래 아름다운 해변 외에는 여행자들이 굳이 찾아올 만한 매력을 가진 곳은 아니다. 이 섬 옆에 싱가포르가 있었기에 싱가포르를 즐긴 후 해변에서 휴식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빈탄 섬에서 대단한 투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빈탄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우리 가족의 호기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판단 잎을 갖고 수공예품 만들어 판매하는 마을 여성들

빈탄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조그마한 가게 몇 곳이 늘어선 마을에서 차가 멈춰 섰다. 투어의 여정 중에 우리 일행을 안내할 가이드를 길가에서 태우기 위한 것이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여성 가이드는 허름한 옷차림에 평범한 외모이지만 영어를 아주 잘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농가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리 빈탄(Sri Bintan) 마을이었다. 우리나라 농촌의 시골길과 다름없는 흙길에는 오리들이 한가롭게 걸어 다니고 있고, 길 옆 나무에는 열대과일의 황제, 두리안이 탐스럽게 열려 있다. 한국과 다른 점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야자수의 이국적인 풍경이다.


판단 잎 수공예 시연. 판단 잎으로 수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준다.
판단 잎 수공예 시연. 판단 잎으로 수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보여준다.노 시경
이 마을에는 투나스 방사(Tunas Bangsa)라는 작은 재단이 창립한 판단 작업장(Pandan Workshop)이 있고, 이 작업장에서 판단 나뭇잎을 가지고 만든 수공예품을 시연하고 판매도 하고 있었다. 이곳 수공예품들은 수공예 기술을 함께 배운 마을 여성들이 여가시간에 함께 만든 것들이다.

이곳 수공예품들은 빈탄 섬의 여러 기념품 가게와 해변 리조트들에서 판매되고 있다. 농업이 주산업인 빈탄의 이 농촌 여성들은 작업장을 함께 소유하면서 수공예 산업을 통해 부업의 기회를 제공 받는다. 이 제품들은 모두 빈탄 휴양지에 오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 수공예품을 만드는 원재료인 판단(Pandan) 잎은 빈탄에서 자생하는 나뭇잎인데, 난초 잎같이 생겼고, 길이가 매우 길다. 녹색이 아주 짙은 이 판단 잎은 수공예 마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원주민들은 이 흔한 판단 잎을 자신들이 사용하는 모자를 만드는 데에 주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수공예 작업이 분업화되었고, 다양한 수공예 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판단 잎 수공예품. 스리 빈탄 마을의 특산품이다.
판단 잎 수공예품. 스리 빈탄 마을의 특산품이다.노 시경
이 투어의 가이드와 마을의 한 아주머니가 판단 잎을 가지고 수공예품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직접 시연을 한다. 판단 잎은 대개 이 마을 남성들이 농장이나 마을 인근의 숲에서 수집하는데, 대부분 싱싱한 어린잎들만을 수집한다.

수집된 판단 잎은 일단 잎 주변의 가시를 제거한 후, 조각조각으로 찢어 균일한 골자만을 추려낸다. 한 개의 판단 잎은 이때 최대 6개의 가늘고 긴 조각으로 나뉜다. 그 후 이 판단 잎 조각들은 물 안에서 끓여지고, 천연염료를 이용하여 필요한 색을 칠한다. 그리고 마지막 과정으로 햇볕에 판단 잎 조각들을 말린다.

이러한 몇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판단 잎 조각들은 티카(Tikar)와 라라(rara)가 된다. 티카(Tikar)는 정형화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크기의 네모 모양으로 짜여진 기본 매트를 말한다. 이 티카 조각은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지고 바느질로 재봉된 후, 판지(板紙)와 접착제를 붙여서 모양을 완성한다. 라라(rara)는 판단 잎을 돌돌 말아 만든 새끼줄 재료이다. 라라는 망태기와 숄더백 등 많은 제품 생산을 짜기 위해 사용된다. 티카와 라라는 다림질과 클리닝을 통해 수공예품으로 완성된다.

아내는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나무 기구를 손에 잡고 가시 잘린 판단 잎을 다듬는 일을 직접 해 보았다. 이 마을의 아주머니들도 아내가 한번 해보는 작업을 열심히 거들어 준다.

나는 이 마을의 아주머니들을 보면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들은 관광객인 우리들에게 마을 특산품을 팔기 위해서 모인 것인데, 물건을 기필코 팔아야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들 자기 집에서 쉬고 있다가 관광객들이 왔다고 하니까 마을 중앙의 상점 겸 작업소에 모인 것 같다. 빈탄의 나른한 여름 날씨 같이 이들의 행동도 나른했다.

우리 가족과 일행인 거구의 프랑스 아저씨가 가이드에게 한 마디 한다.

"당신! 우리가 여기에서 이 물건들을 사기를 원하는 모양이지?"

가이드도 깐깐한 이 서양인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을 포기한 모양이다.

"원하면 사시고, 원하지 않으면 사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가족도 이 빈탄의 마을에서 판단 잎으로 만든 특산품을 사지는 않았다. 제품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이 허름한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마을 주민들이 이 수공예품을 팔아서 얼마나 수익을 볼 수 있을지 걱정됐다.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의 눈빛이 너무 순진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빈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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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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