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어떻게 되는 거여하재근
자유무역의 원리는 그런 나라들에게 탈출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장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복권을 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 민중은 자본(투자자)에게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자유화는 그 자본(투자자)를 규제할 국가권력을 거세한다. 그리하여 자유경쟁의 시장에서 약자는 언제나 강자의 먹이가 될 뿐이다.
그 약자의 비참한 생활은 때때로 강자의 인간적인 면을 흔든다. 그리하여 약자들이 비참하면 비참해질수록 그 약자들의 생활상은 연민의 대상으로 부각된다. 강자들은 국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그들을 돕는 부의 재분배는 용납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것의 일부를 털어 그 약자를 구호하는 정서적 호사는 선호한다.
가장 비참한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세계 중산층의 정서적 호사를 위한 기호품이 된다. 결국 매우 빠른 속도로 백만장자가 늘어가고 있는 이 자유화 모범국 대한민국의 수도 한 복판에 저런 전시회가 열린다. 한미FTA의 자유화와 함께. 제 나라 민중의 절망과 함께.
이 땅의 민중은 제 나라 국민의 한갓 연민의 대상에서조차 탈락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멋진 내쇼널지오그래픽 사진으로 전해지는 비참한 아이들의 모습은 가슴을 들뜨게 하는 연민의 대상이지만 이 땅의 민중은 구질구질하고 시끄럽기만 한 이방인일 뿐이다.
한 아프리카의 저널은 자기 나라의 국민이 제 나라에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다고 썼다. 한미FTA 추진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 민중도 이 땅에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노동자고, 농민이고, 구조조정의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다. 이 땅의 주인은 오직 구조조정의 주체인 자본(투자자)뿐인 것 같다. 그 외엔 이방인이다. 그리하여 그 주체들만 부자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그들의 잔치(주가폭등)가 벌어진다. 이방인은 길바닥에서 소리만 칠뿐이다. 지금처럼 가다가는 그 이방인의 자식 대가 돼선 소리칠 기운조차 사라질 것 같다. 미국의 이방인인 흑인들처럼. 자기 나라 흑인 아이들이 마약하고 총 맞아 죽은 데는 냉담하면서 아프리카 난민에 열광하는 미국 중산층같이, 우리도 제 나라 노동자, 농민의 고통엔 냉담하면서 세계의 난민을 염려하는 선진국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