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 전 사선을 넘나든 노병 이야기

[인터뷰] 손계남 6.25 정읍참전용사회 회장

등록 2007.06.25 17:40수정 2007.06.2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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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손계남 대한민국 6.25상이군경회 정읍지회장

손계남 대한민국 6.25상이군경회 정읍지회장 ⓒ 정읍시민신문


공산주의자들의 무력침탈을 저지하고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6·25전쟁이 57주년을 맞았다. 4백만 여명의 인명피해와 1천만 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과 전쟁미망인, 고아들이 생겨난 비극의 6·25는 우리 민족사의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북 정읍에서는 6.25 전쟁으로 인해 당시 2백여 명의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참전했고, 지역을 수호하다 산화한 전사자의 수는 3천318명이었다. 정읍시민신문은 6.25전쟁 57주년을 맞이해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정읍시지회를 찾아 손계남 회장과 참전용사들을 만났다.

6.25전쟁 발발 당시 최전방에서, 서울에서, 때론 후방에서 전국을 돌며 수많은 치열한 전투에 참여하고 수없는 죽을 고비를 넘긴 손계남(78) 참전용사는 매년 6.25를 맞는 기분이 남다르다.

충렬사에 위치한 보훈회관에서 만난 손옹은 젊은 기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본격적으로 참전에 관한 이야기에 들어가자 손옹의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영화 같은 전쟁이야기

전쟁 발발 당시 육군 하사였던 손옹은 군에 입대한지 2년째 되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부대 안에 울려 퍼진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휴일을 앞두고 부대원들의 외출, 외박으로 한적해진 내무 실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소대원들은 새벽녘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깨어나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이렇게 손옹은 6ㆍ25를 맞았다. 최전방이었던 1사단 11연대 ㅇ중대 정보과 소속이던 손옹은 이미 6ㆍ25발발 전 북에 넘어가 해주에 있는 북측 보안대를 폭파한 경험과 이중간첩 3명을 끈질긴 추격 끝에 잡아 연대장에게 인계한 노련한 군인이었다. 11연대는 곧바로 전투에 참여했으나 워낙 많은 숫자였던 이북군의 기세에 눌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손옹도 살기 위해 무작정 앞만 보고 뛰었다.

"산등성 묘지 앞을 뛰어가다 그만 칡넝쿨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어요. 그때 포탄 하나가 바로 앞에서 터지더라고. 넘어지지 않았으면 포탄에 정통으로 맞았을 겁니다."

손옹은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부대원들과 흩어진 뒤 혼자서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던 그는 이후 문산에서 아군과 합류해 재공격을 펼쳤으나 임진강변에서 완패, 또 다시 후퇴하며 한강부근에 다다랐다.

한강을 건너자마자 갑자기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손옹 일행은 땅바닥에 엎드렸다. 국군이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오해하고 그러는 것이라 생각한 그는 엎드린 채 총 끝에 태극기를 매달아 흔들었다. 이윽고 상대편에서 '국군만 나오라'는 말이 들려왔고, 일행은 안심하며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들은 인민군이었다. 다짜고짜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을 총으로 쏴 죽였다.

이렇게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5번째쯤에 서 있던 손옹은 갑자기 "뛰어라" 소리에 미친 듯이 한강 쪽으로 뒤도 보지 않고 뛰었다. 총성은 끊이지 않고 울렸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또다시 정처 없이 헤매며 내려갔다.

그는 안양에 있는 보병학교로 찾아 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얼마 되지 않아 적군의 비행기 공격을 받았고, 그는 무조건 도랑에 엎드렸다. 이때 옆에 있던 병사는 차 밑에 엎드려 있었는데 그만 폭격으로 사망하고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포탄의 탄피에 등을 맞았다.

다시 혼자가 돼 헤매다 어렵게 1사단 소속 12명의 병사들과 재회한 손옹은 수원농고에 집결한 육군본부에 합류, 이곳에서 중대장으로부터 함께 싸우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미군이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어요. 그 힘든 와중에 얼마나 기운이 솟던지…."

1950년 뜨거운 8월 팔공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군과 적군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반복했다. "어느 날 연대장의 부름을 받고 적군이 점령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반대편에 있는 국군 20연대에 그날 새벽 총공세를 함께 펴자는 서신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20리길을 달렸어요. 뛰면서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아닌 것 같더이다."

하지만 서신을 전해 받은 20연대장은 준비부족으로 새벽공격이 어렵다고 말했다. 자칫하면 저 편에 있는 아군이 전멸할 상황이었다. 이 급박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시 달린 손옹. 부대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새벽을 진동하는 총성이 울렸고 그의 몸에는 이미 팔과 다리에 두발의 총알이 박혔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간신히 20연대장의 답변을 전하고 자칫 아군을 몰살로 몰고 갈 뻔한 전투를 피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부상당한 손옹은 전선에서 나와 대구대학병원으로 후송됐다. 대구시내는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미군이 빼앗긴 고지를 아군이 되찾고, 적군이 다시 뺏는 상황이 50일째 이어졌다.

이윽고 처절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군은 추석이 지나면서 점차 위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손옹은 다시 전선에 불려가 오대산전투, 향로봉전투. 설악산전투 그리고 치열했던 고성전투에 참전하고 또다시 총탄에 큰 부상을 당해 속초야전병원을 거쳐 대수술을 받고 부산으로 이송 후 1952년 2월7일 명예 전역했다.

국가는 이미 이등상사로 소대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한 그에게 '화랑무공훈장'을 내려 치하했다. 현재 손계남 옹은 1997년부터 지금까지 6ㆍ25참전용사 상이군경회 정읍시지회장직을 연임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1사단이 평양에 입성하는 대목을 말하며 활짝 웃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손옹의 모습에서 목숨을 걸고 조국사랑과 나라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전쟁영웅이 아닌 당당한 인생을 살아온 인생영웅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손옹은 전역 후 한전에서 25년을 근무하고 고향을 지키며 살아오고 있다. 아래는 손계남 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6.25 전쟁이 발발한지 57년이 지났습니다. 매해 이맘때가 되면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1950년 당시의 대한민국은 무척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거기에 3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전 국토가 쑥대밭으로 변해 그 참상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국민들의 의식 변화를 바탕으로 평화와 민주주의가 자리 잡고 그 위에 경이로운 경제성장을 이뤄낸 모습을 보면 그저 감동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 현재 정읍에 있는 6.25 참전 용사는 몇 명이나 되고, 처우는 어떤지?
"정읍에는 398명의 상이군경회 회원들이 있습니다. 처우는 상이군경보상법에 의해 공상자의 상태에 따라 1급에서 7급까지 나뉘어 차등 시행되고 있습니다. 등급에 따라 한 달에 가장 적게는 23만 4천원에서 184만 8천원까지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습니다."

- 듣기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전쟁 당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는데?
"지금 살아남은 분들치고 죽을 고비 안 넘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디 안 도망가고 싸웠더니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웃음)"


- 전쟁 참전 용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와 화가 났을 때는?
"보람이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 한 몸 바쳐 이 나라, 내 고향을 지켜냈다는 것이죠. 화가 났던 적은... 아니, 그 보다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던 적이 있지요. 오래전에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라는 사람이 참전 용사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6.25 발발 당시 여러분들이 막지 않았으면 진작 통일이 됐을 거 아니냐'고. 저는 제 눈과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사회 지도층이라니... 그 밑에서 공부한 학생들은 대체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 최근 북한 핵 문제로 남북 관계가 어느 정도 싸늘해 진 게 사실입니다. 무기 수출과 미사일 발사 실험 등 북한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북한은 세계 유일무이의 폐쇄국입니다. 유감스럽지만 아직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퍼주기 식의 지원은 곤란하다고 생각해요. 북으로 가는 모든 것들이 굶주린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확실한 보장만 있다면 저부터 당장 쌀 몇 가마니 보낼 의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지금 저들이 무슨 돈으로 무기를 만들겠습니까? 그래서 독재국가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최근 반미 감정에 대한 의견은?
"저는 6.25전쟁 당시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미군의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 관점에서 볼 때 반미감정은 한 국가를 구원한 고마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의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로서 요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한심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사회가 핵가족화 되고 그로인해 부모들의 과잉보호가 계속 되면서 가장 폐기 있고 거침이 없어야 할 젊은이들이 오히려 갈수록 나약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 나라에 다시 전쟁이 났을 때 과연 저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라는 불신마저 생깁니다. 어디 도망가지나 않을 런지... 쯧쯧."

- 통일이 언제 될 것 같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아직 먼 얘기인 것 같습니다만, 세상일이야 모르는 것이니 당장 내일이라도 될 지 누가 알겠습니까?(웃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야 되고 그 시점은 남과 북의 경제, 문화적인 격차가 최소화 됐을 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북 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전북 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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