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 태평로 삼성 본사 앞에서 열린 시사저널 기자회견 중 시사모 회원으로서 '지지발언'을 하고 있다.(시사저널 노조,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시사저널 기자들의 릴레이 편지-1일째 중에서)시사저널 노조
나는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시사모')에서 '안일(安逸)'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다. 내가 맨 처음 투쟁(?)을 한 것은 1997년 대학 새내기 시절이다. 때는 연세대 사태(1996년 8월 연세대에서 벌어진 충돌사태. 대학생 5848명이 경찰에 연행돼 이 가운데 462명이 구속되고 3341명이 불구속 입건됨)가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투쟁분위기가 뜨거웠지만, 전반적으로 1997년은 학생운동의 쇠퇴기를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비운동권계열의 존재가 급부상되었다. 게다가 국민의 정부 시절에 터진 IMF 사태는 학생들을 군대로, 도서관으로 내몰았다. 신문이나 교양서적을 읽는 학생들이 사라졌고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구분은 점점 없어져 '고교 4학년'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 후로 10년. 새내기였던 청년은 별다른 자극 없이 소시민이 되어가고 있던 차에 '시사저널 사태'가 터졌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이 사태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는데, 무엇이 나를 이토록 이끌었을까. 더욱이 나는 <시사저널>이라는 매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그 '관계'에서부터 <시사저널>의 문제는 시작된다.
신문이 만들지 못한 '시사저널 의제'를 스스로 만들다
내가 <시사저널> 기자들의 투쟁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된 것은 파업을 시작한 지 70일이나 지난 '지지방문 모임' 때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한민국의 주류 언론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는 비교적 진보 매체라고 평가받는 <경향신문>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스크랩을 하고 있었는데, <경향신문>이 <시사저널>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현재까지 10건 남짓이며 사설 등을 통해 의견을 낸 것은 단 1건, 외부 필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의견을 낸 것도 단 1건이다.
비교적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두려고 노력하는 나조차도 <시사저널>과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을 나의 '의제'로 삼지 못했다. 내가 <시사저널>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하게 찾아왔다. 저널리즘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세 작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한민국을 강타한 '황우석 사건'을 보도한 < PD수첩 >의 한학수 CP가 쓴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드려야 할까요>라는 책과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 그리고 <시사저널> 기자들이 쓴 책 <기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책 안의 절절한 내용들을 접하면서 이들을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투쟁하지만 행동으로 투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 구호에서나 보았던 '행동하는 양심'을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흔하지는 않지만, 기자들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다. 이것을 어려운 선택이자 딜레마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저널이 저널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 직면한 것이다."
그 글에서 나는 이와 같은 말을 남겼는데, 대한민국의 언론에 해당하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언론은 저널로서 가치를 인정받을 소중한 기회를 이미 날려버린 것이다.
안일한 독자임을 고백하다
출판기념회를 하고 얼마 후에 있었던 '힘주는 모임'이 있었다. <시사저널> 기자들은 파업 이후에 4번 이사를 했는데, 맨 처음 거리로 내몰렸을 때 '천막'부터 시작해서 언론재단 18층인 언론노조 사무실의 '한 켠', 용산 서울문화사가 보이는 시사저널 노조사무소, 최근 옮겼다던 목동의 방송회관.
퇴근길에 찾아간 언론재단 건물은 웅장해서 나 같은 일개 서민에게는 틈입을 허할 것 같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18층 언론노조사무소는 매우 친근하고 소박했다. 그 한 켠에 케이크가 놓여 있고 여러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대부분이 기자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기자들의 수만큼 나와 같은 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시사모'(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이었다. 진행자는 내가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동안 잠시 진행을 멈추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언론노조 사무소 시절(?)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그때는 기자들의 마음속에 '투쟁'보다는 '순정'이 더 강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군 전역 후 복학을 앞둔 열혈청년이 낭송하는 편지를 들었을 당시에는 사건의 진상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때라 설익은 문장과 추상적인 개념만이 귀에 들어왔는데, <시사저널> 기자들은 저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글'이라면 나보다도 이력이 날 정도로 썼던 사람들이 문장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기자들은 '뜻'을 읽었던 것 같다. 공자의 '어눌함'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행사가 거의 다 끝나갈 즈음이었는데 진행자가 진행을 잠시 중단하고 나에게 인사를 권했다. 지각한 데다가 언론사와 관계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선뜻 발언권을 주는 것이 몹시 당황스러웠으나 모임에 찾아가면서 뇌리 속에 항상 끓었던 '울분'을 쏟아내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기자들도 안일했고, 독자들도 안일했고, 우리 모두 안일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우리들의 만남을 근사하게 만들어 가자고 제안했다. 뒤이은 술자리에서 한 기자가 나에게 '가슴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잘 들었다고 이야기하며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내가 안일한 독자로 남을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세상은 이미 '다른 독자'를 원하는 데 나는 전처럼 읽으려고만 했다. 문어체의 위력에 짓눌리면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안일'이라는 딱지를 스스로에게 붙인 것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안일한 독자가 아니다."
나의 투쟁
시사모는 언론독자운동의 역사적인 캠페인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시사모답고 유의미하게 기억되는 캠페인은 바로 '나도 고소하라'와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이다. '나도 고소하라'는 금창태 사장이 <시사저널> 사태와 관련해 의견을 낸 <시사저널> 기자들과 각계의 인사들에게 고소 폭탄을 내던졌을 때 시사모 회원들이 실명을 내세우며 자신의 의견을 용감하게 게재한 운동이다. 지금도 시사모 홈페이지(www.sisalove.com)에는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진품 시사저널 예약운동'이다. 이미 짝퉁 시사저널이 인쇄되어 나오고 있지만, 독자들은 '진품 시사저널'이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구독료를 미리 입금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시사모의 몇몇 회원은 금창태 사장에 의해서 또다시 '고소'를 당해야만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신문이 독자를 고소한 것은 아마 또 하나의 역사로 기억할 만하다.
내가 싸운 방식은 예컨대 고재열 기자의 방식과 유사하다. '나의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다. 고재열 기자는 <시사저널> 사태를 알리기 위해 '퀴즈 프로그램'에까지 참여했다. 나는 이처럼 특출한 방법은 아니지만 나름으로는 선방(?)했다고 생각한다. 자칭 '작가지망생'이기도 한 나는 글로써 <시사저널> 기자들과 함께 싸웠다.
4월 <시사저널> 노조사무소 개소식 때는 나름대로 투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축시'를 써서 배포했고, <시사저널> 투쟁 100일 문화제 때는 행사장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기사를 썼던 소녀기자를 형상화하여 시를 만들었고, <시사저널> 사태를 기탁하는 우화 '함부로 짖는 개'를 썼다.(공교롭게도 <오마이뉴스> 2007년 6월 26일자 "눈물의 결별식… 아, 시사저널!"라는 기사에서 노순동 기자에 의해 소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싸움은 바로 '곁에 있어 주기'이다.
사실 글을 쓰고 기사를 쓰고 하는 일들은 <시사저널> '곁에 있어주기' 또는 '관심 갖기'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 기자회견이나 문화제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 가장 독자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자로서 맨얼굴을 드러내고 현장에 선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독자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 더 옳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