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떠나보낸 자리에는 배꼽이 있다

등록 2007.07.03 10:02수정 2007.07.0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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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오동나무. 열매가 노끈처럼 가늘어 노끈나무라고도 한다. 또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나무라 하여 뇌신목(雷神木), 뇌전동(雷電桐)이라고도 불린다. ⓒ 박옥경


장마다. 장마가 시작되면 우중충하고 습기 찬 날씨가 기분을 우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옷이나 가재도구도 심하게 신경통을 앓는 듯하다. 언제 볕이 날까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면서 선풍기를 틀어 빨래를 말린다. 그러나 볕에 고슬고슬하게 말린 것만 못하여 상쾌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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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쓰지 않았더니 가꾸지도 않은 포도 덩굴이 새끼를 달고 있다. ⓒ 박옥경


이렇게 장마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들은 쑤욱쑤욱 잘도 큰다. 덩굴식물들도 넌출넌출 손을 뻗어 어디까지라도 가볼 기세다. 꽃을 피우고, 꽃을 떠나보내고, 또 어느새 열매를 맺고 하는 그것들은 물에 잠기면 잠긴 대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해를 향해 몸을 틀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대를 잇기 위한 작업에 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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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넌출거리며 담밖으로 길을 낸다. ⓒ 박옥경


언제 저렇게 올망졸망 열매가 열렸을까? 텃밭에는 대추며 감, 토마토, 무화과, 석류 등이 모두 윤기나는 2세들을 달고 있다. 품새가 의젓하다. 아니, 의연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장마든 가뭄이든 사생결단으로 버티는 저들은 정말 의연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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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듯 어린 감이 언제 굵었을까? ⓒ 박옥경


상처 없는 생명의 탄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새순이 돋는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겨울눈은 새순에 생명의 길을 내주는 동시에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는 모든 것들은 꽃을 떠나보내야 하고 꽃 진 자리는 배꼽으로 흔적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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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상으로 나가는 길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 박옥경


과일을 먹을 때마다 배꼽을 만들고 떠난 꽃의 자리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냇가에서 기저귀 빠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햇살에 빛나는 물결은 눈이 부시고 어머니들의 이야기는 동화처럼 귀를 간지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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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와 석류- 석류 배꼽은 유난히 크다 ⓒ 박옥경


그렇게 대를 이어온 세상은 입아아입(入我我入)이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인 것이다. 특히 무화과를 보면 그 안에 내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머니의 뱃속에 내가 웅크리고 옹알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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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처럼 속으로 품어 안고 가야 할 게 더 많은 세상이다 ⓒ 박옥경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까발리고 산다.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것처럼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인신공격도 불사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다.

꽃을 속으로 품어 안고 익어가는 무화과의 삶과 인간의 삶이 무엇이 다를까. 무화과처럼 속으로 품어 안고 가야 할 게 더 많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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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리가 팡!! 터질 것 같다 ⓒ 박옥경


비가 잠깐 그치고 해가 나면 벌들이 신난다. 도라지꽃 속을 헤매고 다니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저물녘의 보랏빛 도라지꽃은 카메라에 신비한 파란색으로 잡힌다. 도라지꽃봉오리가 카메라 속에서 팡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다. 땅 속으로 배꼽을 만들고 있을 도라지는 제 몸이 피워낸 꽃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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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잠깐 그치자 신나는 벌들 ⓒ 박옥경


아주까리 꽃을 처음 보았다. 꽃이 붉은 술을 달고 열매를 맺는 것도 처음 보았다. 붉은 것이 암꽃이고 밑에 미색으로 핀 것이 수꽃이다. 저 어리고 귀여운 밤송이 같은 2세를 만드느라 수꽃은 수정 후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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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까리-빨간 것이 암꽃, 미색으로 밑에 핀 것이 수꽃, 수꽃은 수정 후 죽어간다 ⓒ 박옥경


사람도 각자의 달란트가 있듯이 식물도 각자의 달란트대로 살아간다. 그것이 생존을 위한 본능에 다름아니라 할지라도 욕심을 부리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해치는 사람보다 얼마나 도덕적이며, 생산적이며, 성실한 삶인가 말이다.

장마 그치고 나면 훨씬 굵어진 열매들이 뙤약볕에 몸을 달굴 것이다. 또 다른 배꼽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세상을 위해, 달콤한 보시가 되기 위해.
#꽃 #과일 #열매 #석류 #개오동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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