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죽어간 '노숙소녀', 살아서도 외톨이였다

빈곤·장애·이혼부모 '삼중고'... 거리로 내몰린 죽음

등록 2007.07.05 23:17수정 2007.07.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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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찰이 인터넷에 공개한 노숙소녀의 옷가지 등 유품들.

경찰이 인터넷에 공개한 노숙소녀의 옷가지 등 유품들. ⓒ 수원남부경찰서


50여일 영안실 냉동고에서 이름도, 부모도 찾지 못했던 일명 '노숙소녀'(김아무개, 15세)가 지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끝내고 긴 안식에 들어간다. 경찰은 최종절차로 김양의 어머니 양씨(46)와 DNA 검사결과를 확인한 뒤, 시신을 인도했다. 6일 장례식을 치른 뒤 유해는 수원 화장터에 뿌려질 예정이다.

5일 오후 수원 중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인터넷에선 네티즌들의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지만 빈소는 썰렁했다. 김양의 부모와 취재진 서넛 정도만 눈에 띌 뿐이다. 한국청소년쉼터협의회(회장 한관희 목사) 명의로 된 근조화환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영정 사진은 아이가 죽기 얼마 전에 찍은 것이라고 한다. 생머리 단발에 가름한 얼굴, 뿔테 안경을 쓴 사진 속 소녀는 전형적인 여중생의 얼굴이었다. 소녀의 주검을 찍은 사진과는 사뭇 달랐다. 얻어 맞아 멍든 얼굴은 많이 부어있었다.

김양의 아버지(51)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지 못했다. 서지도, 앉은 것도 아닌 쪼그린 채 넋을 놓은 표정이었다. 그는 "7년 만에 보는 건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김양의 부모는 7년 전 이혼했다. 가난이 불화를 불렀다. 그 전까진 세 식구는 용인시 신갈에서 살았다. 이혼 뒤 아버지 김씨는 고향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노모를 모시며 살아왔다. 그는 농군이다. 하지만 가진 땅뙈기 없이 소작농으로 하루 일당 5만원이 수입의 전부다. 김씨는 작년 연말 딸아이를 잠깐 만났다. 서울 여의도에 쌀 개방 반대 시위를 위해 상경했다가 외할머니집에 있던 딸을 면회하듯 봤다고 한다.

그는 해남 산이면 농민회 사무장을 맡고 있다. "일 바쁜데 자꾸 나오라 한다. 그것도 이제 그만 둬야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전국 농가는 FTA 반대 문제로 시끄럽다. 그는 "아이를 해남 선산에 묻을까 했지만 날마다 찾아가게 될 것 같다"며 부인의 뜻에 따라 수원 화장터에 뿌리기로 결정했다.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엄마는 비정규직, 아빠는 농부

어머니 양씨는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애를 제대로 돌보질 못해서…."
"얼마나 귀엽고 예뻐…."
"엄마 곁에 얌전히 있지… 나가는 걸 어떻게, 묶어둘 수도 없고…."

마른 눈물을 흘리는 김양의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언론에 불만을 표시했다. "우리 애는 가출소녀도, 노숙소녀도 아니"라며 몇 가지 보도된 것과 다른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죽기 열흘 전 가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이가 집을 나간 날짜는 5월 12일. 그러니까 죽기 이틀 전, 토요일 오전이었다. 일요일 자정을 전후해 수원역 노숙자(29살 정모씨로 수원구치소에 수감 중)의 어이없는 '착각'으로 2만원을 훔친 도둑으로 몰렸고, 인근 고등학교로 끌려가 1시간에 걸쳐 구타를 당했던 것. 쓰러진 아이를 응급조치했다면 살 수도 있었지만 뇌출혈과 새벽 찬공기에 저체온증이 겹쳐 결국 사망한채 발견되었다. 어머니 양씨는 "누가 도와줬으면 살았을텐데"라는 말을 몇 차례 반복했다.

경찰에 가출신고라도 했더라면, 아이의 시신이 저토록 오래 냉동고에 있지는 않았을텐데…. 죽을 때도, 죽어서도 아이는 얼마나 추웠을까. "신고를 해봤자…." 어머니 양씨가 지레 포기한 이유는 이랬다. 김양은 친구가 없다. 채팅으로 그때그때 만나는 거리의 친구들이 전부다. 채팅으로 연락돼 만난 친구들과 PC방에서 하루 이틀을 보내다 돌아오곤 했다. 길어야 3, 4일이면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아이가 집을 나간 뒤 곧잘 경찰기동대에서 연락이 왔다. 애가 PC방에 있다가 돈을 내질 못하니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고 그럼 내가 대신 가서 돈을 내고 데려오는 식이었다. 돌아올 땐 꼬박꼬박 전화를 했었다. 이번에도 이제나저제나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아이가 들어오지 않은 날이 길어지자, 양씨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잘 있다. 서울 어디에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언젠가 들어오겠거니 기다렸다. 아이가 집을 비우는 동안 양씨는 일도 그만 두었다. 식당일과 청소일을 하면서 한달 40, 50만원 수입으로 모녀가 살아왔다. 그 수입으로 어떻게 살았을까?

"돈을 거의 안썼어요. 먹는 건 내가 다 집에서 만들어 먹였고…. 얼마나 춥고 배고팠을까. 힘이 없으니 맞고 그렇게 쓰러진 거지…." 저소득층 지원 혜택도 모녀를 비껴갔다. "내가 아직 젊다고 안된데요."

시각장애로 학교에선 따돌림

오후 4시께 김양의 학교친구 세 명이 찾아왔다. 어머니 양씨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너희들이 좀 잘해주지…"라며 원망 섞인 말과 함께 아이들의 등을 쓸어내렸다. 이날 처음 안 사실이지만 김양은 장애를 지니고 있었다. 약시가 심한 시각장애 6급. 김양의 주검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검은색 뿔테 안경 알이 유난히 두꺼웠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1학년 때부터 학교 가기 싫다고… 애들이 놀리고 머리도 때린다고… 전학가고 싶다고 얼마나 그랬는데… 너희들이 보는 시선이 싫어서…."

안경을 썼어도 아이는 늘 눈을 찡그린채 세상을 바라봤다. 학교에선 혼자였다. 말을 걸어오는 친구도 없고,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석은 잦아졌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갔다. 문상 온 친구들의 말이다.

"우리하고는 말을 좀 했어요. 급식을 먹으러 가자고 해도 책상에 엎드려 있기만 하고…. 원래 3학년인데 결석이 많아 2학년으로 복학했어요. 어쩌다 학교에 나오면 아이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왜 왔냐'고 놀리고…."

죽은 친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없냐는 질문에 한 아이가 "하늘나라에서는 적응을 잘 했으면 좋겠어요. 거기에도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양씨는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다녀간 것 알게 이름을 말해주라"며 딸의 영정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은 것만 기억해라. 다 용서하고…."

학교에서 외면당한 아이는 인터넷 채팅에서 친구를 구했고, 늘 저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과 어울렸다. 꾸준한 친구도 없었다고 한다. 양씨는 "친구가 없다. 컴퓨터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15살 소녀는 그렇게 거리로 내몰렸던 것이다.

한관희 목사가 문상을 왔다. 그는 안양청소년쉼터에서 6개월 전쯤 김양을 본적이 있었다고 한다. "키(170센티미터)가 컸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고 말했다. 집을 나온 10대들은 돈 떨어지고 잘 곳이 없게 되면 이런 쉼터들을 임시거처로 사용한다. 하룻밤 정도 씻고 자고 먹고 할 요량일 뿐. 쉼터 선생님들이 요구하는 기록카드엔 '거짓말' 투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신상이 공개되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내지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자고 해도 거절하면 강요할 수 없다.

"그래서 미성년자들은 찾기가 힘들어요.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조회도 안되고…. 일단 쉼터에 오면 한 이틀 그냥 쉬라고 해요. 신뢰가 쌓여야 속내를 털어놓으니까. 그런데 이틀을 넘기지 않고 휙 사라져요. 그럼 찾을 길이 없죠."

경찰에서도 애를 먹는다. 10대 변사체가 발견되면 대부분 연고자를 찾지 못한다. 이름도 없이 화장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주검이 다리 밑에서 발견되면 한동안 '다리녀'라고 불리다 세상과 작별한다. 김양이 세상에 '노숙소녀'라 알려진 것도 경찰과 언론이 붙인 이름이었다.

"하늘에서라도 잘 적응하기를..."

신원이 밝혀지기 전, 김양 관련 보도를 접한 뒤 "위령제라도 지내주자"며 몇몇 단체들과 준비해왔던 김대술 신부(수원다시서기상담센터)가 장례식장을 찾았다. 김 신부는 김양의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이를 죽인 노숙자는 제가 데리고 있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했다.

살인죄로 수원구치소에 수감중인 가해자 정아무개(29)씨는 김 신부가 운영하고 있는 지원센터에 자주 들르던 노숙자였다. 이 지원센터는 수원역에서 노숙하는 이들에게 물품도 지급하고 재활상담을 해준다. 노숙인들은 수시로 문을 열고 들어와 "먹을 것 좀 달라"고 허기를 호소한다. 옷과 이불도 골라 간다. 정씨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김 신부는 정씨의 가족을 찾았다. 울산에 사는 노모가 유일인 혈육이었다. 하지만 자기 한 몸 가누기도 벅찬 노모는 "나도 귀찮은 몸"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김양의 어머니는 가해자 얘기가 나오자 이내 흥분했지만 김 신부의 얘기를 듣고 난 뒤 "없는 놈이네…"라며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김양의 부모는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 문상객도 별반 없었지만 "조용히 치르고 싶다"며 방송카메라를 향해 연신 손을 내저었다. "제발, 혼자 조용히 있게 해줘요." 아이의 부모도 사는 일에 지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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