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8일 삼성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전 시사저널 노조원. 플래카드의 '자랑스러웠던 독립언론' 문구가 눈에 띈다.오마이뉴스 권우성
내가 만나본 <시사저널>의 구성원들 가운데 시끄러운 사람은 없었다. 대체로 말투는 나직했지만 이따금 킬킬거리며 잘 웃었다. 그러다가도 의문이 있는 사안에는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파고들었고 옳다고 믿는 사안에는 대문을 활짝 열고 있는 포도청 앞에 서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본과 방패막이 없어 받아들여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 구성원들을 혈족처럼 화합하고 단결하게 했던 것 같다. 이런 게 품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든 그랬다는 것이다.
타고난 품위는 그렇다 치고 결국 만인이 공감하는 진정한 품위는 스스로의 부단한 연마와 심덕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창간호부터 발간 17년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품위에 후천적 노력으로 쌓아올린 품위를 합쳐 언론매체로서는 드물게 느껴지는 품격을 보여주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내부에서 어떤 번민과 투쟁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단 한순간에 그 품위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게 저속하고 호들갑스러우며 아마추어적으로 보였다. <시사저널>이라는 제호조차 조악스러운 단어와 그림 속에 포위되어 누추해져 버렸다. 수상한 사실, 수상한 견해가 수상한 제목, 수상한 문장을 타고 춤을 추었다. 그 전의 <시사저널>에서 품위를 느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잡지는 많고도 넘치며 그게 좋고 나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 품위가 자꾸만 생각났다. 어떤 존재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힘들, 전당포에 맡겼다 되찾는 결혼반지와 다른, 내림굿을 골백번 해도 얻어지지 않는 그 품위가.
<시사저널> 기자들의 싸움이 내게는 그 품위를 되찾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어쩌면 헛될 수도 있는. 싸움은 계속되었다. 안타깝지만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좋은 잡지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내게 품위가 없는 <시사저널>은 <시사저널>이 아니라 시시한 시사와 너절한 저널을 합친 '시사 + 저널'일 뿐이다. 오염된 우물을 포기하라, 무너진 진지를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문득 싸움이 끝났다.
새로 태어날 잡지는, 분명히 예전의 품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에 더해, 온 몸을 내던지는 격렬한 싸움 끝에 다시 본연의 일로 돌아간 '품위 있던 <시사저널>'의 구성원들의 끈기 있고 날선 기운이 보태질 거라고 믿는다. 서둘지 않고 선정적이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중심이며 엄정한 눈에 눈물까지 가진 잡지가 멀지 않은 어느날, 오래도록 알고 지낸 친구의 선물처럼 우편함에 들어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좋은 잡지를 읽는 것이 좋은 잡지를 만드는 행동일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품위 있는 좋은 잡지가 우리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며 공동체의 건강에 유익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성석제는 소설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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