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지옥'에서 벗어난 20대 은행원 이야기

[인터뷰] 실적으로 평가받는 사회에 사표 던진 이영씨

등록 2007.07.08 19:22수정 2007.07.10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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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영씨와의 만남을 앞두고 나는 설레기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불과 1년 전 내로라하는 은행에 취직을 해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가 몇 달 전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장애와 수면장애, 그리고 원형 탈모 초기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서울 신촌에서 만난 그는 수척하고 우울해 보였던 지난 5월과는 달리 얼굴에 제법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단지 정수리에 탈모의 흔적이 적지 않게 거슬렸을 뿐.

서울 소재 모 은행에 근무하던 윤이영(여·25 ·가명)씨는 지난 5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세간에 청년실업이 심각하다 어떻다 하는 말이 많지만 그런 건 이영씨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2005년 3월 입사 이래 사표를 낸 지난 5월까지, 근 1년간 그는 바람 빠진 튜브를 매고 대양을 항해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을 테니까.

'실적'으로 평가받는 사회

무엇이 퇴사를 결심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실적의 압박"이라고 한 마디로 답했다.

"입사하기 전에 사람들이 실적 얘기를 하면서 쉽지 않을 거라고 겁을 줄 때는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필요한 사람한테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한테도 지점 실적을 위해 이런저런 상품을 권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싫었어요…. 손님이 없는 날조차도 카드 실적을 올리라는데…, 사람이 없는데 내가 무슨 수로 실적을 올리겠어요."

실적의 압박은 단지 상사의 지시에 그치지 않는다. 계약직 사원의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위한 평가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실적'이기 사람들은 사활을 걸었다.


"저는 정규직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도 부담이 덜 한 편이었던 것 같아요. 제 옆에 진아(가명) 언니는 그것만 몇 년째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피 말리는 거죠."

그렇다면 '실적'은 단지 계약직만을 옭아매는 올가미일까? 사정은 대리급 이상의 사원이라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한 번은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점점 오르는 대중교통비에 짜증을 내던 나에게 기본 교통요금보다 100원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그녀의 교통카드에 대해 설명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생각 있으면 꼭 자기에게 연락을 달라던 그녀. 알고 보니 아버지께서 서울 소재 은행의 지점장으로 재직 중이라고.

부모님 모두 은행원으로 근무하시는 이 아무개(22)씨도 비슷한 처지다.

"아빠만 봐도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는 게 느껴져요. 오죽하면 제 친구들한테 홍보 좀 하고 신청서 좀 받아오라고 하겠어요."

일선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창구 직원뿐만 아니라 후방의 데스크에서 업무를 보는 과장 이상급 사원들조차 실적의 올가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사뭇 놀라웠다.

실적 앞에 위아래 없다

다시, 이영씨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지점장님도 답답하셨는지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회사가 우리 지점 실적 많이 올리도록 너네들을 달달 볶으라고 날 이 자리에 앉혀놓은 것 같다'고요.이런 일도 있었어요. 저는 펀드상품에 관심을 보이는 손님에게 열심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죠.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고 대기인원이 많아지니까 로비매니저가 그 손님을 자기가 안내하겠다며 데려가더군요. 서류작성도 마쳤고 컴퓨터에 입력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상사의 지시이니 따를 수밖에요. 정말 황당했던 건 나중에 보니 자기 이름으로 실적을 올렸더라고요."

이영씨는 일선에서 고객을 접하는 창구직원과 달리 상대적으로 고객을 대면할 기회가 적은 상사들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주는 압박이 너무 심하다.

"지점장님이 '부진점 대책회의'에 다녀오시면 저희들은 하루종일 시달리게 되요. 심지어 청원경찰한테까지도 상품을 홍보하라고 시키는 마당에…."

실제로 현재 M 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유 아무개(18)양의 지갑 속에는 체크카드가 3개나 된다.

지혜양은 "친구들이랑 학교 앞에 걸려있던 현수막 속 카드가 예뻐서 만들러 갔어요"라며 "그거 만드는 중에 은행원 언니가 놀이공원이랑 영화관 할인해주는 또 다른 카드를 권해줘서 그것도 만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체크카드는 만 14세 이상이면 발급이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 카드의 디자인을 미끼로 학생들을 현혹한다. 아직 합리적인 금전관을 갖지 못한 중·고등학생 이 은행의 실적 올리기의 희생양으로 이용되고 있는 셈이다.

오피스가나 학교 주변처럼 사람이 몰리지 않는 한가한 주거지역에 있는 지점의 경우에는 실적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부진점'의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점장들의 노력은 타은행과의 담합에까지 이른다.

"윗사람들이 실적의 압박을 받게 되면 근처에 위치한 타은행에 연락해서 직원 수대로 신청서와 신분증을 복사해서 맞교환해요. 그럼 조회를 해봐서 우리 쪽 은행 카드가 없으면 신규가입을 시키는 거죠."

"이곳보다 나은 저곳은 없다지만..."

이영씨의 이야기를 듣던 중 생각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커피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매일같이 금융 업무를 위해 은행에 가야했고 자연스레 은행원 언니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상품권유에 나는 수차례 거절을 반복했지만 "도와달라"며 대놓고 애원하는 바람에 결국 신용카드와 적립식펀드를 가입했다. 그 후로 나는 웬만한면 ATM기계의 사용을 선호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이영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입장에서도 정말 속상한 점이 그거예요. 제가 일했던 지점의 경우는 업무를 마치고 고객 명단을 뽑아서 전화로도 상품 권유를 시켰어요. 고객 감사 전화의 경우에는 하는 저도 기분이 좋고 받으시는 분도 부담이 없지만 이런 전화는 정말 하기 싫거든요. 받으시는 분도 당연히 귀찮아하시고요."

고객을 자신들의 실적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은행. 그 안에서 은행원과 고객은 모두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실적에 열을 올리는 것인지 '고객을 배려하는게 기본'이라고 말하는 모 은행의 광고에 물음표가 찍힌다.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이영씨의 얼굴이 여러 차례 울그락불그락 달아올랐다. 이것 또한 은행에 근무하면서 생긴 증상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아는 언니를 만났는데 첫 마디가 무슨 일 있었느냐고 성격이 바뀐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래요. 말수도 줄고, 멍하니 있기도 하고. 죄진 사람마냥 항상 불안하고 잠도 움크려서 자고…. 회사에서도 '실적'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한 손으로 배를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하고 지점장 면담 있다고 하면 두 손으로 찌르는 듯했어요."

이영씨는 일을 그만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동안 과중한 업무로 하지 못했던 일도 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아픈 것도 많이 괜찮아졌다고.

"이곳보다 나은 저곳은 없다죠. 어디를 가나 어려운 일이 있고 사회가 다 그런 것은 알지만 당분간 다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얼마 전 다른 은행에 근무하는 친구를 만났어요. 역시나 그놈의 것(실적) 때문에 스트레스 받길래 제 민증을 주면서 할거하고 돌려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인터넷 뱅킹, 신용카드, 체크카드 몇몇 개가 집으로 오더군요." (웃음)

오랜만에 보는 이영씨의 활짝 웃는 얼굴은 그동안 그의 마음고생을 모두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실적 지옥'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기를. 그리고 다시 일어서 그녀의 길을 찾아가기를 바란다.
#실적 #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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