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는 갔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시 더듬더듬 읽기] 정희성의 시 <유신헌법>

등록 2007.07.16 20:39수정 2007.07.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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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기억하기 위한 비망록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 가장 많이 들었던 전래동화는 '호랑이와 곶감'이었다. 이야기 줄거리는 울음 바이러스에 걸린 아이를 처치해 볼 요량으로 아이 엄마가 여우 백신, 곰 백신, 호랑이 백신을 차례로 써 보지만 별 효능이 없던 차에 '곶감 백신'을 다운받아 겨우 처치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아이가 자람에 따라 곶감이 전혀 무섭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자연히 '곶감 백신'도 효능을 잃고 만다는 것.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지 마시라. 세상은 넓고 백신은 지천이니까.


'곶감 백신'의 시대가 거(去)하면 '에비!' 백신의 시대가 도래한다. 우리 자랄 적엔 삼천리 방방곡곡 '에비!'라는 접근 차단 프로그램이 깔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담배도 연애질도 술도 '에비!'라는 차단 프로그램 하나면 끝이다. 이 차단 프로그램 앞에서 우린 얼마나 많은 순간 좌절을 맛봐야 했던가. 이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한 8ㆍ15가 수천 돌아온다 한들 우리는 결코 해방된 나라의 백성이라 할 수 없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제도화된 권력이 아닌 이른바 '인격화된 권력'의 횡포를 비판하는 것조차 이 '에비!' 프로그램이 차단하고 나섰다. 이 프로그램의 꼭짓점에서 댄스를 추는 건 박정희였다. 아마도 권력 헤프게 쓰기가 그처럼 쉬운 호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버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더니 '유신헌법'이 꼭 그랬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차단 프로그램이 탄생한 것이다.

고교 시절과 유신헌법에 대한 추억

박정희가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자신의 권력을 가일층 강화하고자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던 때, 나는 순종의 상징인 빡빡머리를 한 고교 2년생이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바로 그 다음날부터 교내는 온통 '공포'라는 탄저병이 지배해 버렸다. 그 여파가 당장 내게도 닥쳐왔다.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학교 선생들이 교육청에 올리는 가짜 보고서 작성 요원으로 차출되었던 것이다.


어느 선생님 이름으로 쓰거나 보고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나는 오늘 시내에서 ○○○을 만나 유신헌법에 대해 설득했다. 처음에는 유신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나중에는 적극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 사람은 또 몇 명을 찬성으로 유도했다."

보고서 작성은 국민 투표일인 11월 21일 전까지 계속되어 나의 하드에 엄청난 부담을 안겼다. 왜 선생들은 자신들이 직접 작성하지 않고 저작권조차 없는 이런 유의 창작물을 내게 맡겼던 것인가.


그렇게 선생님들까지 광적인 유신헌법 홍보에 총동원하고도 모자라 공포 분위기 조작까지 서슴지 않은 끝에 그해 11월 21일 행해진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은 90%가 넘는 투표율에 역시 90%가 넘는 찬성으로 통과되고 박정희는 마침내 '종신 대통령'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학교 선배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난 선생님들에게 친근한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품지 않았다. 우린 이미 승진을 위한 근무평정을 좌지우지하는 교장의 전횡 앞에서 '그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선생님들의 행태를 알고 있었다. 어느 선생님인가는 교장이 기침하는데 옆에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식의 케케묵은 구식 버전을 사용했다는 소문까지 나돌기도 했다.

교장한테 '맞장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로지 화가 김기창의 부인이자 자신 역시 화가였던 박래현 여사의 남동생이자 체육 담당인 박내재 선생 한 사람뿐이라는 게 우리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까마득한 학교 선배이면서 정치경제를 담당하는 서울대 법대 출신의 신지식(가명) 선생도 아부의 달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고1 정치경제 시간에 들어온 그는 사사오입 개헌 당시 헌법학자 한태연이 자신이 저술한 헌법학 책 서문에다 "이 헌법은 무효다"라고 썼다면서 그의 학자적 양심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함과 동시에 자신이 그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자랑해 마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은 한태연과 갈봉근이었다. 국가비상사태는 신지식 선생의 양심마저 악랄한 바이러스에 감염시켜 버린 건지 모른다. 그는 유신헌법이야말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것이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권리는 잠정적으로 유보되어도 좋다는 논리를 앞장서 펼쳤다.

그러니 이 모든 게 박정희 1인 지배 강화를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는 걸 이미 간파하고 있던 내게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였겠는가. 고1 때는 그에게서 옐리네크가 말한 "양심은 법의 최소한"이란 법언을 반복적으로 배우기도 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법이란 양심의 외연"이다. 우리나라의 파행적 헌정사를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시던 선생님이 오늘에 이르러 유신헌법을 입이 닳도록 찬양한다면 그의 양심의 외연이란 손바닥만도 못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난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을 아예 잊어버렸다. 신지식 선생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서울대 법학과를 나오고도 법관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의 좌절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불운이 그가 취하는 모든 행동에 대하여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은 유신공화국이다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포스터.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포스터.시네마서비스
정희성 시인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 비평사, 1991)라는 시집 속에 수록된 '유신헌법' 시에서 유신헌법을 이렇게 패러디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요건은 민주공화당이 정한다.

- 정희성 시 '유신헌법' 전문


민주공화당은 박정희의 수족 같은 정당이었다. 유신 본당이었다. 용케도 난 민주공화당이 정한 국민의 요건을 충족시켜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잃지 않았으며 이듬해 3학년으로 자동 업그레이드되었다.

밤 11시까지 보충수업과 야간자습이 행해졌다. 원숭이 수준을 겨우 벗어난 내 하드의 용량으론 다운 직전에 이르는 것이었지만 '너는 내 운명'인 것을 어찌할 것인가. 나긋나긋 5월의 훈풍이 불어오자 반 친구들의 결석이 부쩍 늘어났다. 서울의 유명한 사설학원 종합반에 다니고자 상경해 버린 것이다. 나중엔 거의 절반 정도만 출석하는 변태적인 교실 풍경이 연출되기에 이르렀다.

다른 반에 비해 우리 반 애들은 크게 유별났다. 일본에서 출제된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 따위를 들고와서 쩔쩔매는 선생님을 보며 고소해하거나 선생이 보는 앞에서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좀 실력이 모자란다 싶은 선생의 수업 시간엔 아예 출석 호명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묵언 수좌'까지 있었다. 선생님들은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오기를 꺼렸다. 이런 방종스런 수업 분위기에도 모의고사 성적만은 다른 반보다 월등히 높았다. 때로는 교외에서 벌어지는 패싸움조차 우리 반의 '라이센스(license)'에 속했다.

가을로 접어들자 쓸쓸한 바깥 풍경과 학생 없는 우리 반의 교실 풍경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는 자도 결코 신명날 리 없는 나날이 수북이 쌓여갔다.

어느 날 정치경제 시간이었다. 총정리 식으로 수업을 진행하던 신지식 선생은 평소처럼 유신헌법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설명해 나갔다. 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선생님의 인격에 대한 근본적 회의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기 시작했다. 난 수업이 막바지에 이르기를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나 맹랑한 질문을 던졌다.

"1학년 때 선생님은 저희한테 한태연이 사사오입 개헌 때 학자적 양심을 지키고자 그가 쓴 <헌법학 개론> 서문에다 '이 헌법은 무효다'라고 썼다면서 한태연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그 한태연이 지금은 유신헌법을 기초한 대가로 유정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게다가 선생님조차 오늘 또다시 유신헌법을 찬양하시니 대체 지식인의 양심이란 무엇인지요?"

갑자기 반 전체가 침묵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망연자실한 신지식 선생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임아무개라는 친구가 별안간 "히히히히" 웃어 젖히는 바람에 그 깊은 침묵이 깨졌다.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순한 양 같은 신지식 선생이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임아무개가 엉거주춤 교단 앞으로 걸어나왔다. 신지식 선생은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임아무개의 얼굴을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임아무개가 신지식 선생에게 엉겨붙은 것이다. 두 사람은 엉겨 붙은 채로 복도까지 굴러갔다. "이놈이 선생을 치네!~" 외마디 비명에 1층에서 수업 중이던 선생들이 일제히 2층으로 뛰어올라 왔다. 그리고 임아무개를 둘러싸고 집단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동안 지켜보기만 하던 내가 마침내 소리질렀다.

"야, 우리 친구가 뚜드려 맞는다. 모두 나가자."

순식간에 2층 복도는 선생과 학생들이 벌이는 집단 패싸움 터가 되어버렸다. 싸움은 교장선생님이 오시고 나서야 비로소 끝났다. 곧바로 징계를 위한 교무회의가 열리고 가장 악질적인 학생 3명을 골라 퇴학 처분시키겠다는 방침이 공표되었다. 그러나 정작 원인을 제공했던 나는 징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사실 신지식 선생으로 말하자면 내가 볼 일이 있어 교무실에 가기라도 하면 공연히 불러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나를 귀여워 해주셨던 분이다. 다른 선생님들 역시 나를 총애하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제외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졸업까지 불과 2, 3달도 안 남았는데 퇴학이라니! 어떻게든 친구들의 희생을 막아 보려고 교장선생님 면담을 신청했다. 마침 전해에 매우 정치적이던 교장이 전근 가고 새로 교장선생님이 오셨는데 아주 인격이 훌륭한 분이셨다. 정년퇴임을 1~2년가량 앞두고 교직의 마지막을 모교에서 보내시려고 자청해 전근 오셨다고 들었다. 나는 전에도 몇 번 교장선생님 면담을 통해서 말썽 많은 우리 반의 문제를 해결해온 바 있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은 내 면담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해 버리셨다.

할 수 없이 나를 포함한 반 대표 3인은 늦은 밤 관사로 교장 선생댁을 찾아갔다. 우리를 보자 교장선생님은 "뭐하러들 왔어. 나는 들을 이야기 없으니 차나 한 잔 들고 가"라고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납덩이보다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지배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교장 선생댁을 되돌아 나올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결방안을 찾고 나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통사정 끝에 교장선생님께 3분 안에 용건을 말할 수 있는 말미를 얻었다. 지금 내가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일 게다.

"물론 친구들도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소위 '다구리'라 부르는 집단폭행에 가담한 선생님들도 이성을 잃어버린 것은 잘못이 아닐는지요? 우리 친구들을 퇴학시키시려면 선생님들께도 이 부분에 대한 책임을 함께 물어주십시오."

교장선생님께서 약간 화를 누그러뜨리는 기미를 보이셨다. 승기를 잡았다 싶을 적에는 더 세차게 밀어붙여야 한다.

"친구들의 징계 수준을 유기정학으로 낮춰 주시면 저희도 현재의 엄청난 결석률을 한 달 안에 제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이 약속이 흐지부지되면 그땐 어떤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하여 앞뒤 사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우리 반 출석률은 한 달간 거의 100%를 기록했다. 기적적인 출석률 덕분에 세 친구는 유기정학이란 비교적 가벼운 대가를 치른 후 무사히 졸업했다. 임아무개라는 친구는 지금 초일류를 지향한다는 모그룹의 상무로 있다.

역사의 반동을 경계하며

어느덧 30년도 더 지나버린 옛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요약하자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나아가서 1970년대는 '에비'의 시대였다.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인간성을 최고로 발현시키려 하기보다는 금지로써 인간을 윽박지르고 억누르던 시대였다. 박정희라는 '애비'가 자신의 가부장적 권력에 대한 어떤 비판도 허용하기를 거부했던 '에비'의 시대였다.

이제 박정희의 시대는 말끔히 청산되었는가. 이 물음 앞에 곧장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군대 생활의 기억을 끔찍이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익힌 군대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힌 박정희 시대의 해독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엔 "자식은 애비를 닮는다"라는 말과 "인간은 자기가 속한 시대를 닮는다"라는 말은 100% 진리이다. 혹 박정희 얼굴이 생각나지 않거든 집에 가서 아버지 얼굴을 보면 될 것이다. 근엄하면서, 권위적이면서, 위선적인 면모가 있다면 '내 안의 박정희'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게 박정희는 이름을 바꾼 채 우리들의 가정생활 속에서 여전히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을 뜬다.' 이것은 19세기 스페인 화가 고야의 연작 판화집 <카프리치오스(마음 내키는 대로)> 43번 작품의 제목이다. 이 작품의 제목을 거꾸로 뒤집어 말한다면 이성이 눈뜨고 있는 한 역사를 반동시키려는 요괴는 감히 눈뜨지 못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만으로 박정희와 유신의 잔재 청산은 끝이 아니다. 자신의 내부에 잔재해 있는 모순마저 청산해야 비로소 끝이다. 나쁜 구습은 그만큼 타파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신헌법 #박정희 #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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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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