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만 100m, 만 명이 참가한 상소를 아십니까?

유교문화박물관 기획전 '만인소' 9월 2일까지 전시

등록 2007.07.16 16:00수정 2007.07.17 11:37
0
원고료로 응원
a

안동 유교문화박물관에 전시중인 <복제개혁반대 만인소> ⓒ 김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한 아름의 두루마리가 왕에게 전달되고, 왕이 그것을 읽고 얼굴이 사색되거나 혹은 버럭 화를 내는 장면이다. 바로 유생들이 왕의 정치에 반대하거나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대한 왕의 반응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신료들은 왕에게 자신과 붕당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 있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유생과 유학들에게 상소는 유일한 정치참여의 통로였다. 유생들은 스스로 국가의 흥망과 유학의 성쇠에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발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관료가 아니더라도 정치에 참여할 명분은 있었다.

율곡 이이가 "인심이 동의하는 것이 공론이고, 공론이 있는 곳이 국시(國是)이다"고 했듯이 위민정치를 표방한 조선에 있어서 공론의 형성과 이의 정치반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붕당정치가 활성화 된 조선후기에 오면 특정한 상소가 정국의 변화를 가름하는 주요한 변곡점이 되는 일이 많았다.

"공론이 곧 국시"

사회저변의 의사를 반영하는 포괄성과 다중이 참가하는 집단성을 지닌 상소를 통한 공론은 국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관료정치라는 제도 장치보다 더욱 부각되는 측면이 있었다. 연산 때에 일시 차단되기도 했던 공론 형성은 중종 반정 이후 등장한 기묘 사림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어 인종 대에 성균관이 공론소재로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와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기에 이르게 된다.

a

절반만 펼쳐놓은 <사도세자추존 만인소>. 길이가 96.5m이며 총 서명자 수는 10,094명이다. ⓒ 김기

그러나 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빗발치는 상소를 어느 정도 제어할 목적으로 모든 상소는 성균관을 통해 제출하도록 조치했다. 이때 제출된 상소는 반드시 성균관 유생의 우두머리격인 장의(掌議)의 확인을 받아야 했는데 이를 근실(謹悉)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균관 역시 정적인 서인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영남유림으로서는 근실을 받아 상소를 올리는 데에 여러 가지가 애로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만 사람의 뜻은 곧 천하 사람 모두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건 '만인소'다. 다시 말해서 만인소는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줄곧 소수자의 처지에 놓여 있던 영남유림이 자신들의 정치적 열세를 '공론'이라는 형식으로 돌파해보고자 채택했던 현실대응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상소 가운데 규모면에서 만인소에 근접하는 것은 모두 7건인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만인소에 숨은 정치적 의도들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이 가운데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은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 2점이다. 주도세력은 주로 영남유림이었는데, 전국 규모의 만인소 2건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영남유림이 제출했다. 그 중 고종 21년 복제개혁반대를 위한 만인소는 갑신정변으로 정책 자체가 취소되어 발의되지 못하기도 했다.

어떻게 만 명의 뜻을 모았을까?

아무리 영남유림이 서로 뜻이 맞는다 하더라도 만인의 뜻을 모으기란 당시로서는 결코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상소와 달리 만인소는 상소의 과정이 대단히 복잡한 여러 단계를 거쳐서 만들어졌다.

a

1875년에 올려진 <대원군 봉환 상소>의 소수(疏首 상소의 우두머리)를 뽑은 투표지. 2차 상소의 소수를 역임한 유도수가 가장 많은 표를 얻고 있다.(왼쪽사진) 투표에 의해 선출된 유도수를 만인소의 소수로 임명한 임명장(오른쪽) ⓒ 유교문화박물관

먼저 상소할 일이 생기면 향촌의 원로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실무진을 구성하여 상소의 취지를 담은 통문을 향교와 서원에 발송한다. 이때 상소를 추진할 대표인 소두(疏頭)를 선발한다. 소두로 뽑힌 사람은 의례 두세 번 사의를 표한 후에 수락한다. 이렇게 임원진이 구성되면 서원이나 향교에 소청(사무소)을 설치한다. 소청이 설치되면서부터는 모든 전말을 담은 소청일기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

소청에 모인 임원들의 논의를 거쳐 상소할 내용을 담은 소본(疏本)을 채택하고 일련의 의식을 거쳐 최종 결정하게 된다. 소본이 채택되면 서명을 모은 연명부와 함께 붉은 궤짝에 넣어 봉한 뒤 붉은 비단보자기에 싸 별도의 장소에 보관하다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상경한다.

대궐에 당도하면 상소를 담은 보자기를 풀고 소두를 필두로 승정원에 들어가 입직승지에게 소본을 제출한다. 이때 상소의 요지를 담은 대게(大槪)를 먼저 건넨다. 승지로부터 만인소를 받은 왕이 그에 대한 답변인 비답을 내리면 상소행위는 종료하게 된다. 이 비답에 만족하지 않을 경우 궐 앞에서 연좌하여 농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동 유교문화박물관에서 상소에 관한 궁금증 풀 수 있어

이렇듯이 요즘과는 전혀 다를 것만 같은 절대군주체제 하의 공론정치를 체계적으로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유교문화박물관(관장 박원재)에서 개관 1주년 기념 기획전 '만인소, 만 사람의 뜻은 천하의 뜻'을 마련해 만인소를 6월 29부터 9월 2일까지 전시하고 있다.

a

1881년 전국 유생들이 올린 <척사 만인소>에 대해 고종이 건의를 수용한다는 뜻을 담아 내린 교서. 상소가 올려지면 왕이 그에 대한 답변을 내리는데 이를 비답(批答)이라고 한다. ⓒ 유교문화박물관

이번 기획전에는 <임란일기>, <사도세자 추존만인소>, <복제개혁반대 만인소>, <서원훼철반대 상언> 등 한번에 모두 보기 어려운 만인소들을 모아 놓았다.

임란일기는 임란 중에 기록한 일기로서 내용 중에 상소를 올리기로 합의하고 이어 여러 사람이 상소문을 작성한 후 그 가운데 하나를 정본으로 선정해 나가는 과정이 잘 기록되어 있다.

<사도세자 추존만인소>는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달라는 만인소로 정조 때 영남 남인들이 올린 <사도세자 신원만인소>의 후속 상소에 해당한다. 이 만인소의 서명자는 일성록에 10,432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0,094명의 오기인 것이 전시 준비과정 중에 밝혀지기도 했다.

한편 <복제개혁반대 만인소>는 옥산서원 기탁 유물로 1884(고종 21)년 내려진 복제개혁 조치를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한 만인소이나 갑신정변으로 복제개혁 조치 자체가 취소됨으로써 작성되기만 하고 실제로 왕에게 올라가지는 않았다. 서명자 수는 모두 8,849명이다.

역사공부나 사극을 통해 조선시대에 상소가 널리 통용된 것은 알았지만 이렇듯 당시에도 여론을 중시하고 또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뒤따랐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번쯤 둘러보면 역사를 통해 현재의 지혜를 얻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교문화박물관을 찾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유교문화박물관은 그런 관객들을 위해 박물관 홈페이지(www.confuseum.org) 자료마당에 상소의 번역까지 담은 도록을 제공하고 있다.

a

<사도세자추존 만인소>. 왼쪽 아래 길게 이어진 것이 서명자.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한 사람씩 일렬로 기록했다. 또 하나 오른쪽 상소 본문을 보면 문장이 들쭉날쭉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대두법이란 작성법으로 왕이나 왕족을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존경하는 마음의 표시로 일반 문장보다 윗쪽에서 다시 써내려 갔다. ⓒ 유교문화박물관

#만인소 #상소 #영남유림 #절대군주 #여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왜 여자가 '집게 손'만 하면 잘리고 사과해야 할까
  5. 5 내 차 박은 덤프트럭... 운전자 보고 깜짝 놀란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