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까닭

공부하는 즐거움, 아이들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등록 2007.07.17 09:04수정 2007.07.1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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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을 불과 며칠 앞둔 후텁지근한 요즘, 긴장이 '반쯤 풀린' 아이들을 앉혀 두고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은 그저 쉬자는 뜻으로 '자습'하자고, 막무가내로 비디오 보자고 아우성입니다.

하긴 언젠가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가 이구동성으로 공부라고 답하는 통에 무척 데면데면했던 적이 있습니다만, 적어도 요즘 아이들에게 공부란 '공공의 적'임을 부인하진 못합니다.

공부를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지 않는 친구는 거의 없습니다. 그저 중학교 다음 과정이 고등학교이듯,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으레 대학을 가는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들에게 '대학엘 왜 가려고 하는지'를 묻는 것은 무척 생뚱맞은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몇몇 학부모들과 선생님들은 '지금 이 순간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면 대학 가서 자신이 원하는 것 마음껏 할 수 있다'며 공공연한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일련의 과정이 몹시 힘든 것임을 공감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뜻일 테지만, 자칫 아이들에게 대학에 대한 비뚤어진 환상을 갖게 하고, 대학의 존재 의의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가 커 어른이 다 된 고등학생들에게 대학 가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를 물었더니 되돌아온 답변인즉슨 마치 모두가 미리 입을 맞춘 듯 대개 엇비슷합니다. 딱히 이거다 싶은 건 없고, 그저 졸업할 즈음 취직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것을 택하겠다고들 합니다. 언뜻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고 당연한 대답입니다.

그러나 성인식을 앞둔 고등학생 정도라면 자신이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또 다른 이들에 비해 무얼 잘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해봤어야 합니다. 기실 중고등학교 시절이 바로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탐색하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시기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허송'한 채 대학에 가서야 뒤늦게 '철'이 들게 되면 이미 늦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방황'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학한 학과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그저 간판을 바꿔보기 위해, 곧 대학 서열을 한 단계라도 끌어올리기 위해 재수나 편입을 하고,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다시 수능을 치르는 요지경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풍경이 되었습니다.

불과 오래되지 않은 과거, 부모 세대가 집과 땅을 팔아, 소를 팔아 자식을 보냈다는 그 대학이 (부모의 뼛골을 다 빼먹는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개나 소나' 다 가는 '필수 코스'가 되었고, 이제는 단지 서울 대 지방, 명문 대 이류, 삼류의 구도로 전락한 채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끔찍이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학엔 가야 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이제라도 '왜 대학엘 가려 하는가' 묻고 답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대학이 아이들의 바람처럼 자유와 지성이 넘실대는 곳, 수준 높은 학문과 문화를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맹목적 환상일 수 있으며, 자신에게 핑크빛 미래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는 점을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태 전 깊이 공부하고 싶은 게 있어서 집과 가까운 한 대학원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습니다. 학사 일정과 교수진 등을 꼼꼼히 살펴본 후 등록 절차만 남겨둔 어느 날, 운 좋게도 재학 중인 석·박사 과정의 몇몇 대학원생과 술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내색은 못했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생각했던 것만큼 진지하지도, 보람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표정에서 오랜 대학원 생활이 가져다준 피곤에 찌든 일상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공부가 고된 노동이라지만,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공부가 외려 그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되질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 학부에서 배웠던 내용을 더욱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엘 진학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드는 일자리만 나면 한달음에 달려가겠다거나, 어떻든 참고 버텨 대학에 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토로하는 것으로 보아 대학원 진학을 취직의 연장선상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또, 대학에 남자면 지방은커녕 서울 소재 대학원 출신도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외국 대학 출신 석·박사들에게 밀린다며 일찌감치 '꿈'을 접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그들의 자못 '진지한' 푸념을 듣노라니, 대학원생들이 생각하고 겪는 공부와 고3 수험생이 느끼는 그것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저 책 읽는 게 좋아서, 관심 가는 분야를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어서 공부하는 대학원생을, 또 고3 수험생을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들이 학위에 눈이 멀 듯, 고3 수험생들은 대학의 '간판'에 눈멀어가는 현실이 눈앞에 또렷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돌아와 봉해진 등록금 고지서를 펴보았습니다. 몇백만 원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에 기겁했습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왜 대학원엘 가려 하는가', '나는 무엇을 더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가'를 곱씹어 자문했습니다.

며칠 동안 뒤척인 끝에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더 공부하고자 했던 분야의 책을 사서 읽자', '차라리 그 돈으로 두루 여행을 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불과 한 학기 등록금이면 족히 책 몇백 권은 살 수 있고, 그토록 가보고 싶은 남아메리카도 너끈히 여행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학위라는 졸업장만 빼면, 대학원 공부를 통해서보다 책에 파묻혀 살고 이곳저곳 두루 여행 다니며 보고 배우며 얻는 지식이 훨씬 더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외려 더 느긋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책 읽고, 글 쓰고, 여행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자부합니다.

얼마 전 미술계에서 촉망받는 젊은 교수가 박사 학위를 위조한 사실이 들통나 온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런 파렴치한 짓에 분개하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자 했다면 그를 일면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간판과 학위, 서열 같은 껍데기를 단 한 꺼풀도 벗어던지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철저한 '조롱'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나저나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연필 손에 쥐고 밑줄 그으며 책 읽는 즐거움', '매일 아침 신문을 기다리는 설렘', '배달돼 온 새 책에 내 이름을 적어 넣을 때의 뿌듯함' 등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해야겠습니다. 공부가 '가장 쉽지는 않'더라도, 무척 재미있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몸으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고3 #대학원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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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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