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몽양 여운형 60주기- 민족은 이념보다 앞선다 ②

등록 2007.07.18 12:23수정 2007.07.1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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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유묵,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짙다)' ⓒ 몽양 선생 기념사업회

혈농어수(血濃於水)

"몽양이 남긴 유묵 가운데 '혈농어수'(血濃於水)가 있습니다. 몽양의 삶과 사상을 집약한 글이지요. 여기서 혈은 피, 곧 민족을 말함이요, 수는 물, 곧 이념을 말함입니다. 혈농어수란 '민족은 이념에 앞선다'라고 풀이해야 합니다."

강준식 몽양여운형선생 기념사업 상임이사가 힘주어 하는 말이었다. 강준식, 솔직히 나에게는 생소한 사람으로 초면이었다. 몽양과는 어떤 관계로 기념사업회 일을 보게 되었는지 물었다.

"제가 1969년 등단한 이후 먹고사는 일(시카고, 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편집국장 및 논설주간, 정치권, 공기업)에 매달려 작품을 별로 못 쓰고 지내다가 1987년 6·10 항쟁으로 민주화가 된 이후의 민족적 과제는 통일이라는 생각으로 통일문제에 천착하였지요. 제가 공부하고 취재한 바로는 실제로 해방정국에서 통일운동을 한 사람은 몽양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운형을 중심으로 이승만·김구·송진우·김일성·박헌영·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들이 벌이는 꿈과 지략과 경륜의 대 서사시인 <적과 동지>라는 7권 분량의몽양일대기를 쓴 바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를 축약하여 몽양의 통일운동 전말사라고 할 수 있는 <혈농어수>라는 3권짜리 몽양 여운형 일대기를 펴냈지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을 닿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듣던 이기형 선생이 보충설명을 했다. "몽양기념사업회에서 이 분의 작품을 보고 아주 능력있는 분으로 여기던 차에 유정 조동호 선생 아드님 조윤구 씨가 교회에서 강연하는 이 분을 만나 천거해서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영광되게 몽양의 열혈 팬인 이기형 시인과 한 세대를 건너 뛴 강준식 선생을 한꺼번에 인터뷰를 하는 셈이었다. 이기형 선생은 1917년생이시고, 강 선생은 1947년생이니까 꼭 30년으로 한 세대다.

"몽양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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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8. 3. 몽양 장례식 행렬 ⓒ 몽양 선생 기념사업회

"몽양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음에도 '빨갱이' 또는 '준 빨갱이'라고 색칠하여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혹 이름은 알려졌을지라도 그분의 참 모습은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 마디로 그분은 '사회주의자다, 진보주의자다'라는 어떤 틀(이데올로기)에 넣기에는 너무나 폭이 넓은 큰 인물로, 일찍이 세계화가 된 인물입니다.

1922년 고려공산당에 관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는 몽양이 공산주의가 좋아서 가담한 게 아니라 나라의 독립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운 것은 오직 소련이었습니다. 그래서 몽양은 레닌을 만나 200만불 지원 약속까지 받게 된 거지요.

그런 큰 인물을 경직된 눈으로 좌파에서는 친미기회주의자로, 우파에서는 빨갱이로 몰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몽양이라는 인물을 숲으로 보지 않고 나무로만 보는 오류였습니다. 몽양은 평생을 통해 한번도 관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교유하고 만난 사람의 범위도 넓었습니다.

소련의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고, 중국의 손문·장개석·모택동·왕정위를 만났습니다. 일본의 인사로는 일본 천황·고노에후미마로 수상·다나카 기이찌 육군장관·오카와슈메이 육군대학 교수·우카키 이세이을 비롯한 조선총독 등 그분이 만난 인물은 좌우 적과 우군이 없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다와 같은 인물이지요. 이런 분을 하나의 틀에 옭아매는 것은 천만부당합니다.

그분이 마음속에는 당신이 즐겨 쓰고 유묵으로 남기신 '혈농어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민족이 이념보다 앞선다는 고매한 뜻이 담긴 말입니다.

일제하 몽양은 일본 검찰에게 '내가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점이 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정책면일 뿐 나는 신(하나님)을 믿기에 유물론을 믿지 않는다'라고 유물론을 부정한 분입니다.

원래 몽양은 미국사람을 좋아하여 미국으로 유학가려다가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킨 것을 보고 그를 배우고자 중국으로 갔습니다. 몽양은 행동과 더불어 태동한 스스로의 사상가 입니다. 누구의 세뇌를 받은 분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깨우친 민족 우선의 진보적 민족주의 사상가였습니다."

몽양의 통일론이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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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기념사업회 상무이사 강준식 선생 ⓒ 박도

강준식, 그도 몽양 못지않은 달변가였다. 잠시 화제를 이기형 선생에게로 돌렸다. 올해 91세의 춘추인데도 아직 청년의 기백을 지니고 있었다. 선생에게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 했다. 지금은 아들 내외와 한 집에서 사신다고 하는데 손자 육아는 물론 설거지까지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두 내외가 다 도맡고 있다고 하신다. 언제 '이 노인이 살아가는 법'이라는 주제로 대담하기로 약속하고는 다시 강 선생의 말을 들었다.

"해방 당시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몽양이 단연코 1위였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조국분단의 단계적 진행과정은 1945년 지리적 분단, 1946년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회적 분단으로 이동하여 비로소 좌우로 갈립니다. 1948년은 정치적 분단으로 남북정권이 들어서고 1950년에는 한국전쟁으로 민족적 분단이 이루어지지요.

그 공간에서 민족지도자들은 모두 통일을 부르짖었습니다. 초기 이승만은 자기만 떠받치면(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좌도 우도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한민당 계열은 좌파 배제요, 이와는 반대로 박헌영 계열은 친일파와 자본가 배제 곧 우파 배제였습니다. 또 중도의 안재홍은 좌우 합작을 꾀하되 주도권은 우파가 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와는 달리 허헌 계열은 좌우합작을 하되 주도권은 좌파(진보세력)가 쥐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몽양은 어떤 생각이었나 하면, '좌도 실체가 있고, 우도 실체가 있으니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누가 주도하는 것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다. 따라서 좌우 합작은 좌우의 공통점을 확대하고 상이점을 축소하는 것'이라 하여 가장 현실성 있는 대안으로 민중의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강 선생의 몽양론은 그칠 줄 몰랐다. 몽양기념사업회의 애로점을 물었다.

"몽양 선생은 정권도 잡아보지 못하시고 비명에 가셨기에 덕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기념사업회와는 달리 도와주는 분이 없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즈음도 기업체에서는 혹 정권이 바뀌면 세무사찰이라도 당할까 봐 외면하지요."

오늘 만남의 마무리로 이기형 선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자, 오는 7월 19일 몽양 추모제에서 낭독할 헌시 복사 원고를 전해 주었다. 아마도 당신이 하고픈 말은 여기에 다 담았다는 말씀인가 보다.

꼭 원고지 10매로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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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5. 미소공동위원회 미측 대표들과 환담하는 몽양 선생. ⓒ 몽양 선생 기념 사업회

몽양 선생에게 바치는 시

21세기의 화두
-여운형 선생 서거 60주년에

몽양 여운형 선생님!
선생이 저희들 곁을 떠나신 지도
어언 60년이 되었습니다.
인생무상, 세월의 덧없음을 절감합니다.
만감이 가슴을 울렁대며 선생 영전에 허리 굽혀 섰습니다.

선생의 일관한 반일독립투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건국동맹 건준 창건은 현대사의 순도 높은 금맥이었습니다.
좌우 합작, 자주통일, 독립국가 건설 지향은
큰 글자로 현대사를 장식했습니다.

저는 69년 전, 선생을 처음 뵙던 그날의 감격을
망백의 오늘에도 생생히 떠올리고 있습니다.
현대적 첨단 옷차림, 멋진 풍채, 미려한 용모, 유창한 연설,
어찌 잊으오리까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조국은 동강난 채 쪼개진 채로입니다.
선생님께서 생전에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자주통일 자주 독립은
여지껏 이룩해 내지 못했습니다.
저희들의 무능을 꾸짖어 주십시오.

대 선각자, 대 애국자, 온건한 세계적 혁명가 천성적 민주주의자인
몽양 여운형 선생님!

한울님 나라 통일성전 상좌에서
내내 저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옵소서!

2007년 7월 19일
이기형

덧붙이는 글 | 서거 60주기 추모제 ‧ 학술심포지움
“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

* 일시 : 2007. 7. 19(목).
[1부] 추모제 10:00~11:30
[2부] 학술심포지움 14:00~17:00
* 장소 : 1부 - 우의동 묘소, 2부 - 서울역사박물관 강당
주최: (사) 몽양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몽양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 준비위
전화: 02-554-5006
www.mongyang.org

덧붙이는 글 서거 60주기 추모제 ‧ 학술심포지움
“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

* 일시 : 2007. 7. 19(목).
[1부] 추모제 10:00~11:30
[2부] 학술심포지움 14:00~17:00
* 장소 : 1부 - 우의동 묘소, 2부 - 서울역사박물관 강당
주최: (사) 몽양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몽양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 준비위
전화: 02-554-5006
www.mongyang.org
#여운형 #몽양 #이기형 #강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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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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