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애인의 어떤 프러포즈

일상에서 얻는 작은 행복

등록 2007.07.24 10:06수정 2007.07.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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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신연령이 거꾸로 드는 걸까? 고등학교 시절, 남들이 흔히 말하는 반항기에도 남자가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것만 봐도 이해를 못했고 심지어 노래하는 그룹사운드(밴드) 멤버들이 머리를 길러 산발하고 나오는 것만 봐도 혀를 차며 '꼭 저렇게 하고 음악을 해야 잘 하는 거냐?'고 생각하면 이해를 못했었다.

그러던 내가 서른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 머리를 길러 묶고 다니고 있다. 이젠 남자들이 머리를 어찌하고 다니건 신경 쓰지 않는다. 왜? 내가 이러고 다니니까! 그럼 언제부터 나의 고정관념이 깨진 것일까?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1996년쯤인 듯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공백기간을 갖다 일자리를 얻고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나의 숨은 히피족 끼 때문이었을까! 문득 머리가 길러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급한 성격 탓에 이발 한 지 한 달만 넘으면 스스로 답답해 바로 머리카락을 잘라야했기 때문에 생각처럼 머리를 기를 수는 없었다. 해서 몇 달은 거의 다듬는 식으로만 커트를 해 기르다보니 헤어스타일은 영 볼품없어 보였다. 이런 나를 보며 지은들은 '머리를 기르려면 다 이런 과도기가 있는 것이야. 참고 기다려!'라는 식으로 쉽게 한마디씩 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 씩 미용실로 달려가 시원하게 자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어쩔 수 없이 장발이 된 동기

그러던 1996년 11월 자전거를 타고 건널목을 건너다가 10톤 트럭에 치어 한 달 간 중환자실 신세를 지며 5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사고 당시 오른쪽 뒷머리도 조금 찢어져 꿰맸는데 친절(?)하게도 의사선생님이 내 머리를 삭발하지 않고 다친 부분만 잘라낸 뒤 치료를 해주었다. 덕분에 지금도 머리를 짧게 자르며 꿰맨 부분이 살짝 보인다.

바로 그때 약 반년을 머리에 신경을 못 쓰다 보니 자연스레 장발이 됐고 퇴원 후 이발을 할 때도 뒷머리 상처 때문에 짧게 자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머리를 기르고 생활하게 된 것이다.

일단 바람 대로 머리를 기르게 된 것까지는 좋았는데 날이라도 덥거나 음식을 먹을라치면 이 긴 머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특히 앞머리와 뒷머리 길이를 거의 동일하게 길렀던 2000년대 초에는 머리를 묶지 않고는 생활이 불편할 정도였지만 머리를 자르긴 싫었다. 해서 출근을 하면 동료 형이나 사무를 보던 여자 직원에게 머리끈을 보이며 나만의 살인미소를 한 번 띄우면 마다 않고 질끈 묶어주어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손이 불편해 머리 묶지 못한다. 물 컵도 들지 못한다. 손은 고장(?)난 상태로 살아가는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개성이 있고 나름 하고파 하는 일이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는다. 머리를 길러 묶는 일도 뒤늦게 하고 싶었던 일이기에 비록 혼자는 못 묶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더라도 하고픈 일은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매일 누군가에게 머리 묶는 일을 부탁하는 것도 왠지 미안해서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을 해봤었다. 미혼인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결혼을 하기 위해 상대방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하게 되는데 어떤 식으로 해야 멋질까 고민하다가 '나는 만일 프러포즈를 하게 되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 프러포즈 멘트는 아래와 같다.

'자기야, 아침마다 일어나서 내 머리 묶어줄래?'

아, 지금 봐도 과히 단순하고도 썰렁한 프러포즈 멘트다. 이렇게 멋없는 사람이 장가나 갈 수 있을는지 참.

프러포즈 멘트에 숨은 진실

하지만 지금도 난 내 프러포즈 멘트에 감동할 착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철석 같이 믿고 살아간다.

누가 봐도 어이없고 성의 없는 멘트로 보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값진 것이기에 용기를 내어야만 상대에게 전할 수 있는 짧지만 중요한 나만의 프러포즈 멘트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 짧은 멘트 안에 숨은 진실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즘처럼 삭막해진 세상에서 현실에 급급해 하며 사는 현대 기혼자들 중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부가 사이좋게 서로를 위한 시간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비록 짧은 시간이라도 그런 시간을 갖고 일과를 시작한다면 하루가 즐겁지 않을까?

프러포즈가 거창해도 좋겠지만 현실에 맞으면서도 쉽게 지켜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중심으로 한 것이라면 하는 생각과 프러포즈를 받는 입장에서도 더욱 편하고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나의 프러포즈가 1500원이 된 사연

위에서 언급한 프러포즈는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이었고 현실 속에서 나의 프러포즈 1500원짜리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머리가 긴 탓에 이틀에 한 번은 머릴 묶고 외출을 해야 하는데 아침마다는 커녕 온 종일 있어도 내 머리를 묶어 줄 사람은 없다. 해서 나름 용기 내어 찾아간 곳이 집 앞에 미용실. 가서 아줌마와 대화를 나눴다.

"제가 손이 불편해 머리를 못 묶어서 그러는데 수비고 드리고 이틀에 한 번 정도 올 테니 머리 좀 묶어 줄 수 있나요?"
"아, 그러세요.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그럼 가격은 얼마정도…?"
"음… 비싸게는 못 받겠고 그냥 2천원만 주세요."

"(헉…) 2천원이요? 그러지요."

그렇게 1차 합의(?)를 하고 얼마 전까지 갈 때마다 2천원씩 주고 머리를 묶었다. 묶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분? 그 미용사 아줌마는 3분에 2천원을 버는 샘이다. 후… 그렇게 1개월 정도 다니다 하도 비싼 것 같아 며칠 전 용기에 용기를 갖고 재협상을 해 보았다.

"근데요… 좀 싸게 해 줌 안돼요?"
"왜요? 비싸요?"

"좀…."
"흠… 그럼 얼마에 하나… 천원 받을 수도 없고… 그럼 1500원만 주세요. 뭐…!"

"1500원이요? 다음부터 그렇게 드릴게요."
"네… 그러세요."

이렇게 해서 겨우 500원 깎고 미용실을 나오면서 속으로 '내가 아쉬워서 하지 그렇잖음 짤없다!'라는 말을 곱씹었다.

이럴 때 같이 사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비굴한 기분도 맛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머리 묶을 때마다 서로 맘에 드니 안 드니하며 장난도 치며 재밌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비록 머리를 기르게 된 동기가 어떠하든 현재 많이 길렀고 프러포즈 한 번 못하고 묶을 때마다 1500원을 미용사에게 주어야하지만 깔끔하게 머리를 묶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때 나는 작은 행복을 느낀다.

1500원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오늘도 프러포즈 상대를 찾으리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용실 #프러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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