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도 '생각'도 "더 이상 가두지 마라"

국가보안법 피해자 가족들 국회서 문화제 열어

등록 2007.07.24 15:19수정 2007.07.2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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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찾아뵐 수 없어 죄송합니다. 딸이 지금은 아버지 곁에 없지만…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지난 23일 '국가보안법 피해자 가족 문화제'가 열린 국회 헌정기념관. 피해자 가족들과 국회의원, 시민사회단체 회원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행사 도중 조용히 영상 메시지가 방영됐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활동 등으로 벌써 8년째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김모씨 등 수배 대학생들이 가족들에게 보낸 눈물의 영상편지였다.

문화제는 사진작가 이시우씨의 아내 김은옥씨의 기타연주로 시작됐다.
문화제는 사진작가 이시우씨의 아내 김은옥씨의 기타연주로 시작됐다.박상익
영상이 방영되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있는 사진작가 이시우씨 가족, '일심회'사건으로 중형을 구형받은 장민호씨 가족 등 많은 피해 가족들이 고개를 떨궜다.

민주노동당 부대변인 황선씨의 사회로 진행된 오늘 행사는 이시우씨 아내인 김은옥씨의 노래로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사회자의 남편 윤기진씨(범청학련 의장) 또한 국보법 위반으로 수배 중인 몸이다. 정설교 시인은 자신의 판화 전시와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의 뜻을 담은 시를 낭송했고 뒤이어 동국대학교 학생 정원철(사회 3)씨가 강정구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교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제자'로 자신을 소개한 정원철씨는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이 폐지돼 교수님과 함께 자유롭게 공부하면서 꼭 A+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국가보안법 수배자 영상편지. 지난 2000년 조선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이희철 군이 영상을 통해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수배자 영상편지. 지난 2000년 조선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이희철 군이 영상을 통해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다.박상익
국가보안법 대학생 수배자 부모들이 무대에 섰다.
국가보안법 대학생 수배자 부모들이 무대에 섰다.박상익
윤기진씨 아버지 윤범로씨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들이 속히 수배에서 풀려나기를 바랐으며 다른 수배자 부모들도 "국가보안법은 있어서는 안 될 몹쓸 법"이라 국가보안법 폐지와 수배자들의 수배 해제를 요구했다. 곧 있으면 환갑을 맞는 아버지를 뵐 수 없어 죄송하다는 자식의 목소리와, 살아있어도 맘 편히 만날 수 없는 자식을 둔 부모의 애타는 마음이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수감된 이들은 100명이 넘고, 올 상반기에만 12명이 구속됐다. 1990년대에 비하면 구속자 수와 구속률 등은 낮아지고 있지만 최근 들어 전교조와 학생은 물론 사진작가까지 국가보안법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가 가시화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그 적용범위는 늘어난 셈이다.

이시우씨와 장민호씨 또한 국보법의 확대 해석으로 공안정국 만들기 아니냐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상태다. 국가보안법 적용으로 인해 위반 혐의자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 많은 고초를 겪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인의 행동을 넘어 신념과 양심도 국가에 의해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십 년에 걸쳐 생명력을 이어온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기 위해 그동안 민변, 민가협, 국회 등 각계에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여전히 철폐까지는 험난한 상황이다.

행사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들
행사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들박상익
국보법 피해자 가족들의 노래 합창 모습
국보법 피해자 가족들의 노래 합창 모습박상익
이날 행사가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렸지만 현역 국회의원들은 아직까지도 국보법 폐지에 미온적이다. 이날 문화제에는 열린우리당 이광철 김형주 강혜숙, 민주노동당 권영길 이영순 의원이 참석해 국가보안법 폐지 목소리에 힘을 보탰다.

행사 초반 내빈소개로 무대에 오른 국회의원들은 "아직까지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지 못해 여러분께 죄송하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내걸지 않는 대통령 후보와 총선 후보들에게는 표를 주지 말자"며 임기 말까지 국가보안법 철폐에 힘쓸 것을 다짐했다.


온당,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더 이상의 피해가 없어야 함을 촉구하는 자리여야 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 자리에 오지 못했다. 일부는 감옥에 갇혀있고 일부는 경찰에 쫓겨 다니기 때문이다. '생각'의 다름과 차이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비디오카메라 앞에서 가족에게 눈물의 안부인사를 건네야 하는 현실.

이날 행사 알림 펼침에는 이 지긋지긋한 국가보안법에 의한 피해자들이 줄기차게 외쳐온 주장이 다시 등장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이제 '더 이상 가두지 마라'


행사장 밖에는 국보법으로 구속돼 있는 사진작가 이시우씨의 사진전이 열렸다.
행사장 밖에는 국보법으로 구속돼 있는 사진작가 이시우씨의 사진전이 열렸다.박상익


"꽃잎이 꽃가슴을 열 수 있는 것은 꿈 때문이다"
이시우씨가 아들 우성 군에게 보낸 편지

우성이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는구나. 아빠가 재판 준비로 할 일이 많았단다.
오랜만에 운동장에 나가보니 노란 꽃들이 폭죽 터지듯 만발하게 피어있구나. 그중에 아빠는 팔을 벌려 가슴을 열듯이 꽃가슴을 열기 시작한 그림의 꽃망울에 시선이 갔다.

꽃잎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듯 하나 둘 꽃잎을 열어가는 중이었다. 아빠는 순서라는 말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든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 꽃처럼 순서에 따라 열리어 간다는 것을 느낀거지.

순서를 안다는 것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신중하다는 것이다. 순서를 무시하고 조급하게 서두는 것은 일을 망칠수도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또한 신중하다는 것은 두려움을 안다는 것이다. 세상에 두려운 것을 안다는 것과 더불어 자기 스스로에 대해 두려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내가 올바른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돌아볼 줄 알고 내가 틀린 결정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그래서 떨림이다. 그러나 두려움과 떨림에 주저앉지 않고 꽃잎이 결국 꽃가슴을 열 수 있는 것은 꿈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꿈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떨리고 두렵고 신중하고 순서를 밟아 나가는 것이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에 으뜸은 꿈을 품을 줄 안다는 것이다. 농구도 공부도 우성이가 더 큰 꿈을 가지고 더 많은 꿈을 품고 떨림과 두려움과 신중함과 순서를 잃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07년 7월

덧붙이는 글 | 박상익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박상익 기자는 <오마이뉴스> 6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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