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의 첫 동시집 속으로 피서를 가자!

[서평] 안도현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실천문학사, 2007)

등록 2007.07.28 09:43수정 2007.07.2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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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사

얼마 전 100쇄를 찍어 출판계에 커다란 화제가 된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의 저자 안도현 시인. 그의 첫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이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

안도현의 동화 <연어>와 <짜장면>이 그랬듯이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은 아이들이 읽어도 좋고 어른들이 읽어도 참 좋은 책이다. 아니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것 같다. 한 권으로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어주면서 안도현 동시의 참맛을 같이 느낀다면 이 무더운 여름날에 이만한 피서도 달리 없으리라.


먼저 그의 동시 몇 편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개울에서 놀다가 그만 급해서
물속에 앉아 쉬를 하고 말았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두리번두리번
나 혼자 몸을 한 번 떨었습니다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 '나만의 비밀'

토끼가 밟고 가면
토끼 발자국

멧돼지가 밟고 가면
멧돼지 발자국


토끼는 가벼워서
발자국도 얕고

멧돼지는 무거워서
발자국도 깊고


- '눈 위의 발자국'

보름달 같은
수박 한 통

혼자서는
먹을 수 없지
다 함께
먹어야지
나눠서
먹어야지

달무리처럼
빙빙
둘러앉아
먹어야지

- '수박 한 통'


첫 번째로 인용한 동시 '나만의 비밀'은 안도현 시인의 직접적 체험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어린 시절 우리들이 항용 그래 왔던, 부끄럽기도 하고 재미난 물놀이를 그대로 노래한 것이다.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라는 마지막 두 행은 참으로 재미난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연과 아이가 함께 하는 넉넉한 삶의 모습이다. '나만의 비밀'은 나만의 비밀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누구나 그랬던 나만의 비밀이어서 그 공감이 크다.

하얀 눈길 위에 토끼 발자국과 멧돼지 발자국을 그려놓은 동시 '눈 위의 발자국'. 이 동시는 매우 평범하고 단순한 내용으로 보이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되새겨보면 자연과 삶의 이법(理法)을 담담하게 그려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박 한 통'이라는 시는 수박과 보름달의 모양새를 빌려 나눠 먹는, 함께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름달같이 환하게 노래하고 있다.

여치를 잡아
여치집 속에 가뒀더니

여치 소리만 뛰쳐나와
찌릿찌릿 찌찌 찌릿
풀밭에서 우네

- '여치집'

크다가 말아 오종종한
콩나물 같기도 하고,

연못 위에 동동 혼자 노는
새끼 오리 같기도 하고,

구멍가게 유리문에 튄
흙탕물 같기도 하고,

국립박물관에서 언뜻 본
귀고리 같기도 하고,

동무 찾아 방향을 트는
올챙이 같기도 하고,

허리가 휘어 구부정한
할머니 같기도 하고,

- '쉼표'

(배) 배가 고프니?
(꼬) 꼬르륵꼬르륵
(ㅂ) 밥 먹어야 할
(시) 시간이라고?
(계) 계산 하나는 잘하네

- '배꼽시계'


안도현 시인의 고등학교 문예반 선배인 박덕규 교수는 '해설'에서 안도현의 동시를 "말과 사물을 도구로 놀이하는 즐거움", "놀면서 절로 깨치는 세상 이치", "이웃과 함께하는 시의 세상" 등으로 풀어놓고 있다.

말과 사물을 도구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안도현의 말놀이(동시)를 듣는 일은 유익하고도 즐겁다. 이 말놀이를 통해서 우리 아이들은 이웃과 함께하는 삶, 세상의 이치를 깨치는 일이 저절로 몸에 베여들 것이다. 살구꽃 이파리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픈 할머니를 이야기하는 시선은 또 얼마나 소중하고 깊은 눈빛인가?

할머니, 살구나무가
많이 아픈가 봐요

살구꽃 이파리 깜박깜박
저렇게 떨어지는데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봐요
흰 머리카락 올올이 풀어져도
빗을 생각을 안 해요
참빗을 어디 두었는지
잊어먹었나 봐요

할머니, 살구나무가
할머니처럼 아픈가 봐요

- '살구꽃 지는 날'


안도현의 첫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에 수록된 62편의 동시 가운데 내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눈'이라는 작품이다.

돌담 아래
쌓인 눈
쌓였다가 소리 없이
녹는 눈

마당가
목련 가지에는
볼록한 꽃눈
꽃을 피우려고
점점
커지는 꽃눈

마루 밑에는
새끼들 내려다보는
누렁이의 눈
어미를 올려다 보는
강아지들의 눈

- '눈'


인용한 시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눈'이 등장한다. 돌담 아래 쌓였다가 녹는 눈, 목련 가지의 꽃눈, 마루 밑에서 마주보고 있는 어미와 강아지의 눈이 그것이다. "쌓였다가 소리 없이/녹는 눈"이 삶과 죽음의 비의를 내장하고 있다면, "꽃을 피우려고/점점/커지는 꽃눈"은 생명으로 솟아나는 눈빛이다. 그리고 "새끼들 내려다보는" "어미를 올려다 보는" 눈은 사랑의 눈빛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눈을 맞추는, 사랑의 눈빛을 서로 맞추는 아름다운 일이 많아져야 하겠다.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방과 눈빛을 맞추는 일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다. 나는 선(善)이고 너는 악(惡)이라는 생각은 사랑의 눈빛이 아니라 증오와 독선의 눈빛이다. 이 증오와 독선의 눈빛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세상은 분명코 바뀌어야 한다. 그 변혁의 힘은 총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착한 마음자리에서 온다.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아이의 눈빛을 담고 있는 동시를 많이 읽어야 할 일이다. 안도현의 첫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은 5학년 내 아들과 소리 내어 같이 읽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안도현 지음, 정문주 그림,
실천문학사, 2007


#안도현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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