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빈탄의 보름달

[싱가포르 문화기행 37] 빈탄(Bintan)의 하루

등록 2007.07.31 21:52수정 2007.07.3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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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전에 바닷가의 파도 소리가 울리고 있다. 나는 눈을 뜨고 한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정신이 멍했다. 이곳은 서울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니었다. 출근을 서두를 일도 없었다. 휴가를 떠나온 남국의 바닷가에 벌써 해가 솟고 있었고, 주변은 이미 밝아 있었다. 항상 해가 뜨기 전에 눈을 떴는데, 어제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수영을 했던 것이 꽤 피곤했던 모양이다.

약간 피곤한 몸을 털고 일어나 콤팩트 카메라로 해변의 일출 모습을 찍어 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일출 모습을 카메라에 담다가 카메라에 부분적인 고장이 발생했다. 강렬한 태양을 향해 여러 장 사진을 찍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카메라는 태양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비추는 곳을 찍어야 함을 다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간밤에 숙소의 베란다를 강하게 때리던 빗줄기는 언제 일이었느냐는 듯이 아침 하늘이 맑게 개어있다. 적도 지방에 위치한 바닷가이지만, 낮과는 달리 아침은 기온이 선선했다. 나는 잠들어 있는 아내와 딸을 두고 빈탄 앙사나 리조트(Angsana Resort)의 바닷가로 나왔다.

빈탄 바닷가의 모래를 밟으며 조용히 산책했다. 무릇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함께 사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바람직한 것이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홀로 나만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도 일 년에 몇 번 누릴 수 없는 행복 중의 행복이다.

빈탄 해변에서의 산책. 아침 해변의 공기는 선선하다.
빈탄 해변에서의 산책. 아침 해변의 공기는 선선하다.노 시경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이 거대한 해변에서의 나만의 행복은 한 남녀에 의해 깨어졌다. 한 중년 나이의 서양 사내와 아름다운 몸매의 서구 미인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함께 다정하게 걷는 폼과 분위기로 봐서 이들은 분명히 연인 사이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 사내가 분명히 돈 많은 부자이고, 이 아가씨는 이 사내의 경제적 능력을 흠모하는 여자일 것이라는 세속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 남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 이 생각은 바뀌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의 이 아저씨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하고, 이 아가씨도 밝은 웃음을 나에게 보냈다. 아침 인사의 그 맑은 미소. 나는 또 한 번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다. 이 아저씨는 경제적 능력과 함께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온화함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국적 생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이 차가 나더라도 이들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인 것이다.

빈탄 해변의 언덕. 바다로 바위들이 이어지고 있다.
빈탄 해변의 언덕. 바다로 바위들이 이어지고 있다.노 시경

나는 바다 쪽으로 바위들이 돌출해 이어지는 경관을 찾아갔다. 낮은 해변의 언덕 아래로 점점이 이어지는 바위들이 바다 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바위들 위로 만들어진 목재 가교는 바닷가에 가장 가까운 바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마련된 테이블 1개. 이곳은 이 섬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이고, 이 테이블은 바다를 바라보며 식사를 즐기는 곳이다.


빈탄 해변의 빌라. 바다를 바라보는 절경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빈탄 해변의 빌라. 바다를 바라보는 절경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노 시경

나는 우리 가족이 머무는 리조트 바로 뒤 언덕에 자리한 빌라에 올라보았다. 빈탄 섬에서 가장 비싼 숙박료를 자랑하는 이 빌라형 호텔에는 언덕의 기슭에 독립된 빌라들이 한 채씩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거나 신혼부부들이 들르면 참 어울리는 곳이다. 나는 이 바닷가 언덕의 경관을 구경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언덕 위의 넓은 곳에 해변을 바라보며 여러 채의 빌라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길가에 떨어진 이름 모를 열대의 과일을 따 보기도 하고, 무궁화와 똑같이 생긴 꽃의 향기를 맡으며 발길 가는 대로 산책을 했다. 언덕길의 나뭇잎을 청소하던 빈탄 청년에게도 인사 한번 보내고 그의 사진을 찍어본다.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절경이 자리한 곳에는 어김없이 빌라 한 채씩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빌라에 묵는 사람들은 얼마간의 숙박료를 지불하고 이 절경을 독점하는 권리를 잠깐 동안 갖는 것이다. 나는 아침 공기 시원한 이 열대의 언덕에서 바다의 바람을 만끽하며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열대지방에서 햇볕 아래의 낮시간은 활동을 하기에 힘든 시간이다. 이 열대 지방의 태양은 워낙 강렬하고, 작렬하는 땡볕은 인간의 활동을 멈추게 만든다. 여름에 더위를 피해 휴가를 온 곳에서 한국보다 더 심한 더위로 고통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아내, 딸과 함께 숙소 주변의 바닷가와 수영장에서 하루 내내 물을 떠나지 않았다.

수영장 주변의 파라솔 아래 누워 바다를 보니 해가 조금씩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서울의 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운 딸아이는 이 빈탄의 수영장을 떠날 줄 모른다. 아빠에게도 쉬지 말고 수영장에 들어와 같이 놀자며 성화다. 나는 딸아이와 놀다가 다시 파라솔 아래에 누웠다. 딸아이는 이 수영장에서 만난 일본 여자 아이와 수영 경쟁을 하고 있다.

빈탄의 보름달. 높이 솟은 달이 해변을 밝게 비추고 있다.
빈탄의 보름달. 높이 솟은 달이 해변을 밝게 비추고 있다.노 시경

빈탄의 밤이 완전히 저물면서 우리는 바닷가로 나가, 바닷가의 파라솔 아래에 몸을 누였다. 나는 한 파라솔 아래에 넓게 눕고, 아내와 딸은 한 파라솔 아래 딱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딸과 아내는 참으로 할 이야기들이 많다.

나는 편안히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의 하늘 위에는 보름달이 바닷가와 우리의 머리를 비추고 있었고, 인공조명에 빛나는 야자수는 우리 가족을 보호하듯이 긴 가지를 길게 세우고 있었다. 해변 바위 위 목재 다리의 조명이 마치 꿈속에서 나타난 모습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파도는 계속 철썩거리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파도 소리는 더욱 크게 귀 속을 파고들었다. 딸 녀석은 점점 더 커지는 파도소리가 무섭다며 엄살이다. 나는 다시 살며시 눈을 감아봤다. 이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빈탄의 보름달 비추는 환한 밤을 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6년 8월의 여행 기록입니다. 싱가포르 여행기는 이번 회로 마감합니다.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행기는 2006년 8월의 여행 기록입니다. 싱가포르 여행기는 이번 회로 마감합니다.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빈탄 #앙사나 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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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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