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께서는 색종이 가득 무슨 약속을 채워 넣으셨을지.김정혜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은 행여 누가 볼세라 한쪽 팔로 색종이를 가리고 뭔가를 적기도 하시고,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 한 분은 노란 색종이 가득 깨알 같은 글씨로 약속을 채워 넣으신다.
대체 그 색종이들엔 누구에게 한 어떤 약속이 적혔을까 자못 궁금한 반면,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건만 약속이란 두 글자에 색종이를 앞에 놓고 저리 몰두할 수 있음이 또한 새삼스럽다.
문득, 뜬금없는 생각 하나. 나는 내 가족에게 무슨 약속을 할 수 있을까. 남편에게 또 딸아이에게…. 그러다 나도 모르게 '피식~' 탱탱하던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1%의 너그러움으로.' 채 10자도 되지 않는 그 약속 하나도 변변히 지키지 있지 못하면서 또 무슨 약속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2007년 새해. 나는 나 스스로와 약속 하나를 했었다. 1%만 너그러워지기로. 그건 나 스스로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론 남편에게 또 딸아이에게 한 약속이었다. 나 스스로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면 남편에게도 딸아이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매사에 자를 들이댄 듯한 반듯함을 고집하는 편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고 나뒹굴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좁은 집안을 하루종일 동동거려야 했고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남편이나 딸아이에게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어느 날, 그런 내게 남편이 '툭' 내뱉는 한마디.
"집이야? 군대 내무반이야? 좀 느슨하게 살면 당신도 편할 텐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이 아니라 군대 내무반? 아니었다. 순전히 나 스스로 자신의 착각이었다. 집안을 항상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 건 오로지 내 가족들을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내 마음이 엄청난 착각이었던 것이다.
내 가족들이 원하는 건 군대 내무반 같은 긴장감 속에서의 쾌적함보단 느슨한 편안함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 착각은 오로지 나 스스로 자신의 성격에 대한 만족감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그것이 나를 또 내 가족을 참 많이 옭아매고 있었음을 그때야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