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21일(현지시간) 남부 이라크의 알포(al-Faw) 유전을 점령한 영국 특수부대 소속 해병들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자료사진).로이터/뉴시스
썰렁했던 부시와의 회담... '푸들 벗어나기'-'미국 고려'에서 줄타기할 듯
이 같은 영국 정부의 변화된 태도는 지난 주 영미정상회담에서도 일부 감지됐다. 물론 양국 정상은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싸우는 데 있어 하나"라는 데 절대적인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양국의 원칙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외교적인 언사일 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이번 회담에서 도드라진 것은 양측의 미묘한 시각차였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이 "악에 대항하는 선의 전쟁"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집한 반면, 브라운은 "테러리즘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인류애에 대한 범죄"라며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또 브라운은 "테러 대응에서 아프가니스탄이 최전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시는 "이라크가 테러와의 전쟁의 중심"이라고 말해 인식 차이를 보였다. 이라크에서 발을 빼려는 영국으로서는 이라크가 더 이상 가장 중요 지역이 아닌 셈이다.
한편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블레어 때와 달리 분위기가 썰렁했고 더 딱딱했다고 전했다.
사실 이 같은 브라운의 '미국과 거리 두기'는 예정된 일이었다. 브라운이 총리로 취임하고 한 달이 지난 7월말쯤이었다. 영국 언론이 시끄러웠다. 브라운의 최측근 중 한 명인 더글러스 알렉산더 무역개발부 장관이 "이제는 파괴할 때가 아니다, 건설해야 할 시점"이라며 미국이 힘에 바탕을 두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기는 지나갔고 더 평화적이고 협력적인 방법으로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대미정책이 바뀐 것이냐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에 대해 밀리반드 외무장관과 브라운 총리는 미국과의 굳건한 관계를 강조하며 대립적인 관계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브라운으로서는 부시와의 회담을 앞두고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언론을 통해 미국에 상반된 신호를 보이면서 미국의 반응을 살펴보려는 전형적인 떠보기였을 수도 있다고 기자는 본다.
브라운은 이처럼 미국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동시에 세계적인 공익 이슈를 선점하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할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부시와 회담 후 바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만나 수단의 다푸르 사태 해결과 아프리카의 빈곤 퇴치를 위한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같은 영국의 변화를 미국과의 관계 악화나 균열로 직결시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인 것 같다. 극히 실용주의적인 영국 정부가 대미관계를 심하게 악화시키면서까지 자기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은 영미동맹과 자기 목소리 내기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수위를 조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 정부에서 영국의 이라크 조기 철군 계획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고, 결국은 부시가 브라운을 어떤 형식으로든 압박할 것이라고 언론들은 내다보고 있다. 부시의 진짜 압력에 대해 브라운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어쩌면 브라운의 진짜 카드는 앞으로 이라크 철군 문제를 둘러싼 대미관계에서 발휘될 수도 있다.
영국 철군 불똥, 어디로 튈까?
영국이 이라크에서 발을 빼면 그 불똥이 어디로 튈까.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우선 미국은 어떻게든 영국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또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국경 문제부터 정치적인 협상까지 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압박하고 있다고 일간 <가디언>이 8일 보도했다. 이에 대해 유엔 직원들은 안전 위협을 이유로 반대투표를 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은 미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인력과 지원 금액을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이 발을 뺀 지 오래고, 영국마저 떠난다고 하니 미국으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불똥에서 한국 정부는 과연 자유로울지, 언제까지 한국군은 이라크에서 철군도 못하고 주둔해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