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전 기단에서 바라본 무등산.안병기
원효사는 6세기 초에서 중반 무렵인 신라의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효대사가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 하여 원효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원효사 풍경을 확정지은 것은 1980년대 주지였던 신법타 스님이라고 한다. 그때 대웅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을 중창한 모양이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자 닫집이 홀로 나뒹굴고 있다. 제대로 보관하든가 버리든가 하지 않고, 왜 이곳에 이렇게 방치해 두는 것일까.
단청이 벗겨진 고풍스런 옛 원효사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내게 원효사 전각들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경한 풍경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으로 어떻게 감히 이 절의 역사가 1300년이 넘는다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물론 광주시 문화재로 지정된 만수사 범종과 동부도가 있다지만 치지 않는 범종이란 영혼을 상실한 인간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물은 제자리에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원효사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 금동불입상, 청동불두, 소조불두, 청동보살입상 등을 광주박물관이 아니라 이곳에 보관해선 안 되는 것일까.
절 마당에 서 있는 희멀건 한 5층 탑은 1300년 만고풍상을 겪은 원효사의 세월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있다. 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성보각 오른쪽에서 깨어진 탑을 본다. 이것이 예전에 있었던 탑인 모양이다. 기단과 지붕돌이 깨진 모습일망정 반갑기 그지없다.
우리 시대의 '원효' 고은 시인을 떠올리다
대웅전 기단 위에 서서 무등산을 다시 바라본다. 상봉과 서석대를 구름이 감싸고 있다. 참으로 신비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고은 시인이 쓴 자전소설 <나, 고은> 제2권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고은 시인은 1952년 19세의 나이에 전북 군산 동국사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어 일초라는 법명을 얻는다. 그러나 이듬해 그의 스승이자 중관학 권위자였던 혜초 스님의 갑작스런 환속을 목격하고 나서 그는 깊은 충격을 받는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행각승으로 지내던 일초는 마침내 대처승이 주지로 있던 원효사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증심사를 거쳐 무등산 비탈을 올라가 산의 내부에 자리잡은 깊은 산중의 원효사에 당도했다. 주지는 대처승이었으나 나의 행색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법철(法徹)이라는 청년을 만난 것은 뜻밖이었다.
그는 사내인데도 머리를 길러서 그 머릿단이 등허리를 덮고 수염도 앞가슴을 가리는 정도였다. 눈빛에 제법 힘이 들어 있는데 걸핏하면 으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어대고 있었다.
이 사람이 하필 효봉스님으로부터 거사계(居士戒)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어서 나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의 형은 법달(法達)이라는 법명으로 통영 효봉스님 문하에서 정진중이라 했다. 하나는 비록 머리를 기르는 처사지만 형제가 한 스승의 제자가 된 것이었다. (하략)
-고은 자전소설 <나, 고은> 제2권, 140쪽(민음사, 1993)
그는 이 법철이라는 괴짜 청년과 <무자> 화두와 <똥막대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수행에 정진한다. 때로는 눈 내린 서석대에 오르기도 하고 함께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는 등 온갖 기행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어쩌면 여기 머물던 일초 스님 아니 고은 시인은 1300여 년 전 원효 스님의 환생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