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악은 목장이 넓고 오름이 많다.장태욱
해방 이전까지 이 마을에는 광활한 토지위에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서 제주의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유한 마을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중에는 명월, 두모, 안덕면 사계리 등 다른 마을 일대에 밭을 소유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제말기에 강제 공출이 심해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41년 12월 8일에 2차 대전이 일어났다. 대전이 일어난 후 일본 관리들은 전쟁 물자와 양곡, 잡곡 공출에 열을 올리면서 금악리에도 각 가정에 있는 제기, 놋그릇, 숟가락 등 포탄이나 탄알이 될 수 있는 모든 물건은 반장을 통하여 모조리 걷어갔다. 보리, 조, 콩 농사도 수확량의 50%는 공출로 내놓도록 독촉하게 되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서 식량대용으로 고구마와 들나물 등 초근목피로 연명하게 되었다.'
'1945년 4월 12일에 … 협재리 백사장에 상륙한 군인은 만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제주도에는 3만 명의 군인이 들어왔다고 한다. 삼일 동안을 만여 명이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데 군인들이 몇 만 명이 되는지 너무 많아 알 수가 없다. 금악오름 주변 소나무 밭은 온통 군인 주둔지가 되었다.'(자료 : 양일화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고,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면서 마을이 혼란 속에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이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여 정물오름 아래 있는 개역빌래왓괘(동굴)에 집결하여 선거당일을 숨어서 보냈는데, 선거가 끝날 시간에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노인들이 경찰에 잡혀가고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후 마을 주민들은 경찰을 피해 다녀야했고, 서북청년단원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죽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48년 11월 17일에 제주도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군경에 의해 대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1948년 11월 18, 20일 사이에 금악과 그 주변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져 마을 주민들은 정든 집과 가구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마을을 떠나야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3년 8월 본동이 재건되었지만 웃동네와 일동이못 주변은 재건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