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막내 동생인 대고모: 건강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번 여행을 아주 즐거워하신다.이상기
1928년에 태어난 대고모는 1942년 일본군들이 모집한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했다고 한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청주 한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는데, 밥이 온통 잡곡이더라는 것이다. 시집오기 전 올케 언니가 셋이나 되어 살림 하나 해보지 않고 쌀밥만 먹어 난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집이 뭔지 ‘시(媤)’자가 들어가니 밥이 넘어가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우리 집을 조금 더 여유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노무자로 남양군도로 징용을 갔던 것 같다. 지난해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서를 제출하느라 여기저기 남아있는 흔적을 찾으면서 그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1941년 가을부터 1944년 여름까지 남양군도에 갔다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나마 할아버지는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고, 돈도 조금 벌어 땅을 사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귀국할 때 할아버지가 귤 한 상자와 고구마를 가지고 와서 대고모께서 그때 귤을 처음 먹어 보았고, 고구마를 대고모네 마을인 갈골(葛洞)에 보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작은할아버지께서는 1943년 아오모리[靑森]로 징용을 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이 되자 징용 갔던 한국인들이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고, 1945년 8월 24일 일본 해군 소속 우키시마마루[浮島丸]를 타고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배가 교토 북쪽 와카소[若狹]만의 항구 도시 마이즈루[舞鶴]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사망하고 말았다. 작은할아버지에게는 딸이 한 분 계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시고 말아 작은할아버지에 대한 징용 피해 신고를 내가 하게 되었다.
당시 동네에서는 홋카이도[北海道]로 끌려간 사람들도 모두 돌아오는데 그보다 가까운 아오모리에 간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해 다들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나중에 작은할아버지 유골이라고 해서 당고모가 함을 하나 받아 왔으며, 고향의 선산에 작은 묘를 마련해 드렸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자식과 손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지 작은할아버지 묘를 정리하셨다. 그날 할아버지와 함께 작업을 하던 일이 생각난다. 막내 작은할아버지도 남양군도에 징용을 갔다 왔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위의 두 할아버지만큼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할아버지의 형제자매는 모두 6분이었다. 이 중 지금 살아계신 분은 이번에 여행을 함께 한 대고모 한 분이다. 돌아가신 순서가 둘째 작은할아버지, 막내 작은할아버지, 큰 대고모, 작은 대고모, 할아버지 순이다. 할아버지는 더 오래 사실 수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할아버지에게는 할머니가 세 분 계신다. 첫 번째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로 1녀3남을 두고 1957년 세상을 떠나셨다. 두 번째 할머니는 2남을 두고 1972년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이번에 모시고 간 할머니가 세 번째 할머니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고향집을 지키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