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을 견뎌 빨간 치마를 두른 고추밭... "참 고맙네!"

첫물 고추를 수확하며 마음이 넉넉해지다

등록 2007.08.17 11:04수정 2007.08.1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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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추밭. 앞으로 병해충 없이 잘 자라주면 정말 좋겠다. ⓒ 전갑남

풀벌레 소리는 암만 들어도 마땅히 표현할 말을 찾기 곤란하다. "귀 뚜루루… 또르르, 찌르르찌르르!" 참 희한한 자연의 소리이다. 어둑하기 시작할 때 들리는 소리가 동이 트는 시간까지 들린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물기 머금은 깜깜한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까? 그래도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청아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어느 틈엔가 가을의 전령사인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뚜라미, 여치와 같은 풀벌레가 울면 가을 들머리를 알리는 징후이다. 궂은비에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시간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가을의 문턱인가? 하기야 절기상으로 입추가 지났으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 날도 멀지 않으리라.

이른 새벽, 아내가 잠에서 깼다.

"여보, 비 안 오죠?"
"지금은 잠잠한데, 모르지!"
"오늘은 고추 딸 참이지?"
"비 안 오면 후다닥 해치우자구."


정말 날이 맑았으면 좋겠다. 근 보름 동안 햇볕 드는 날이 드물었다. 장대 같은 소나기는 차라리 시원하다. 비인지 안개인지 하루종일 구질구질 내릴 때는 마음도 어수선하다. 아무튼 올여름은 유별난 것 같다. 잔뜩 흐린 날씨에 거센 비바람까지 쉴 날이 없다.

고추 따는 날... 비야 제발 내리지 마라

오늘(15일)은 그간 비 때문에 미뤄둔 고추를 따야겠다. 아내와 둘이서 800여 주 고추를 따려면 한나절은 밭에서 살아야 할 성싶다.

아침을 먹고 마당에 나왔다. 하늘은 잔뜩 구름을 머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산허리에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제발 고추 따는 동안만이라도 비가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웃 할머니도 밭에 나오셨다. 죄다 망가진 열무를 뽑아내고 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오늘은 비 안 온댔지? 원, 세상에! 요샌 빨래 마를 새도 주지 않네!"

할머니는 걱정이 많으시다. 파밭에 대파가 비바람에 쓰러졌다. 해가 나면 빨리 거둬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씨가 여문 참깨도 빨리 베어 털어야 한다. 비 때문 손을 놓아 일이 많이 밀리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긴 한숨을 내신다. 얼굴이 밝지 못하다.

"할머니, 고추는 많이 따셨어요?"
"고추? 첫물은 그런 대로 땄어! 병치레를 해서 앞으로가 걱정이야."
"겉보기는 괜찮아 보이던데요."
"아냐, 쓰러지고, 벌레 먹고 시원찮아."
"저희 것도 쓰러지기는 했는데, 아직 장담은 못하겠어요."
"농사는 하늘이 도와줘야 하는 거야!"


수십 년간 농사를 지은 할머니이시다. 올해처럼 장마가 끝난 뒤에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는 흔치 않은 일이란다.

입추가 지나면 나락모가지가 올라와 벼가 한창 익어간다. 이때 내리는 비는 그리 반갑지 않다. 입추 뒤에 비가 닷새 동안만 계속 돼도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고 한다.

할머니가 오늘은 딴 일 하지 말고 서둘러 고추를 따라한다.

만만찮은 고추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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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치마를 두른 듯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는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 전갑남

고추농사는 공이 많이 들어간다. 여느 농사에 비해 곱절은 손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추는 한 곳에 여러 해 심으면 연작 피해가 있다. 그래 보통 돌려짓기를 한다. 또 밑거름을 든든히 해야 병해충에도 강하고, 고춧대가 실해 수확량이 많다.

어느 정도 자라면 아랫부분 곁순을 따주고, 말장을 세워 줄로 고춧대를 붙잡아 줘야한다. 자라는 것을 보아 네댓 번은 묶어준다. 진딧물과 나방 등의 해충이 많고, 역병과 탄저병 같은 돌림병이 있어 때맞춰 소독을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

오늘은 열일 제쳐두고 첫물 고추를 거둘 참이다. 온갖 궂은 날씨에도 잘 견뎌준 고추가 고맙다. 아마추어치고는 고추농사가 그런 대로 잘 되었다. 며칠 전 옆집 아저씨가 칭찬을 다했다.

"아니, 이제 우리네 보다 더 나아? 이제 고추농사도 선수야 선수!"

어쭙잖게 농사를 짓는 줄만 알았는데 올핸 자기네보다 수확이 많겠다고 덕담을 하였다. 약간 쓰러진 것도 있고, 병해충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것이 있지만, 빨갛게 물든 고추밭을 바라보면 넉넉함이 차오른다.

고추 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조심조심 따야 한다. 힘이 드는 일은 아니지만 여러 시간을 하다 보니 지루하다.

고추밭이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다

아내가 차양이 넓은 모자에 긴팔 옷을 입고 고추밭에 나왔다. 주렁주렁 달린 붉은 고추를 보더니만 너스레를 떤다.

"여보, 고추밭이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죠! 언제 이렇게 붉어졌지? 참 많이도 달렸어. 고맙기도 해라! 첫물을 좀 늦게 따는 건가?"

밭일을 달가워 않는 아내지만 수확할 때는 군소리 없이 척척 잘한다. 아마 수확의 기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로 예쁘게 뻗은 고추가 정말 탐스럽다.

두 이랑을 따자 벌써 싫증이 난다. 이럴 때 누가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 힘들 게 해서 미안하네!"
"뭐가요? 당신 애써 가꿨는데 이까짓 일도 못해요."


아내는 이마에 흘리는 땀을 연신 훔치며 열심이다. 고추 따는 일을 마치자 점심때가 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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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여 주의 고추밭에서 꽤 많은 수확을 하였다. 궂은 날씨에도 풍성함을 주어 참 고맙다. ⓒ 전갑남

평상에 올려놓은 수확한 고추 자루를 보고 아내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와! 이거 몇 가마나 될까?"
"글쎄 세 가마?"
"그럼 앞으로 얼마나 더 딸까? 열 가마는 따겠죠?"
"그렇게나 많이! 욕심은 되게 많네."


애써 가꿔 그만큼도 안 나오면 억울하다고 아내가 쌜쭉한다. 옆집 할머니가 아침에 내게 해준 말씀을 건네주었다.

"첫물이 풍성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두물, 세물, 네물…. 그 이상은 자연이 덤으로 준 선물이라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앞으로는 자연이 주는 선물을 기대해 보자고 한다.

잘 아는 분의 집 건조기에 고추를 깨끗이 씻어 넣었다.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데 소나기가 와락 쏟아진다. 오늘 밤도 가을을 부르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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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한 고추는 깨끗이 씻어 건조기에 넣었다. ⓒ 전갑남

#고추 #첫물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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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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