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지막 손님이 우리를 기쁘게 한 것은...

우연 치고는 기묘한 우연을 다시 생각하다

등록 2007.08.17 16:43수정 2007.08.17 17:4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7월 16일 밤 9시쯤 되었을 때였다. 교회에서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보니 모자를 쓴 한 남성이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배가 고프니 밥 좀 달라는 것이다.


아내는 그를 예배당 안으로 안내했다. 몸에 냄새가 나서 들어가기가 거북하다며 애써 발을 빼려고 하는 그를 반강제로 들어오게 해서 예배당 뒤편에 앉혔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는 청주에 살고 있는데 일자리를 알아보러 대구에 갔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아 차를 얻어타고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경찰차가 저 아래 길에서 내려주면서 교회에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다. 십자가 불이 유난히 크게 보여 우리 교회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니까 그렇지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은 쉽게 연결되지가 않아 알아듣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아내는 밥이 없다며 새로 밥을 짓겠다고 사택으로 갔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슨 일을 하고 지냈느냐고 물었다. 고물장수도 했고, 남의 농사도 지었으며, 담배 농사 포도 농사는 꽤 많이 해봤다는 그의 답변이다.

나는 특별히 누구 집을 상정한 것은 아니지만 포도농사를 해봤다는 그의 말에 "지금 포도농사 도울 집이 있다면 일을 하겠느냐?"며 그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그는 좋다며 의기양양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그의 신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물어볼 차례이다. 주소는? 청주시 인평동…. 번지는 모른다고 했다. 전화번호는 (043) 701… 다음은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이사 가서 전화를 놓은 지는 5년 정도 되는데 배운 게 없어서 기억하지 못한다는 답변이었다. 핸드폰은? 있기는 있는데 집에 두고 왔고 역시 번호는 모른다는 것이다.

임기응변의 거짓말투성이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몇 살이냐고 물으니 47년생이라고 한다. 47년생이면 환갑이 막 지난 나이인데, 도저히 그렇게 보이진 않는 젊음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도 조금의 뻥튀기가 있는 것 같았다. 자녀 관계를 묻자 2남2녀를 두었다고 했다. 큰아들은 장가를 들어 가정을 꾸렸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고향을 물어봤다. 떠듬떠듬하더니 옥천이라는 것이다. 이것 봐라? 옥천은 내가 살다가 온 곳이 아닌가! 옥천 무슨 면? 청성면이요. 무슨 리? 소서리요.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이름(송원섭)을 들었을 때, 또 얼굴을 봤을 때 구면인 듯한 친근함이 있었는데….

그가 소서리 출신이라니! 소서리는 내가 전에 사역하던 마을이었다. 나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송근섭씨를 아느냐, 그럼 송희섭씨와 송이섭씨는? 20년 전에 소서리를 뜨긴 했지만 그 이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서 집사님과 박 집사님이 기도회를 참석하기 위해 예배당을 들어섰다. 나는 불청객 송원섭씨를 사택으로 데리고 오면서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넓고 넓은 세상에서 배가 고파 밥 한 끼 얻어먹기 위해 교회를 찾은 사람이 내가 사역했던 소서리 출신이라니….

아내는 "오늘 손님들이 계속 교회를 찾았는데, 마지막 손님인 이 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며 정성을 다해 저녁상을 준비했다. 상을 차릴 동안 몸을 씻으라며 욕실을 안내하고 몇 가지 세면도구까지 챙겨 주었다.

그는 저녁밥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몸을 씻은 후 술기운도 많이 가신 표정이었다. 서 집사님과 박 집사님이 사택으로 들어왔다. 나는 서 집사님에게 "좋은 일꾼을 한 분 하나님께서 보내셨는데, 서 집사님 농장에 일 좀 하게 하라"고 부탁했다.

서 집사님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즉답을 피했다. 일을 하겠다는 그 사람이 더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그의 고향 마을(소서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은연중 부담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일자리를 구하러 돌아다닌다는 사람이 일자리는 그만두고 저녁밥만 먹고 가겠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종전과 180도 바뀐 그의 완고한 태도가 서 집사님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이 분명했다.

작지 않은 그릇에 많이 담은 밥을 말끔히 해 치우고, 가겠다는 그에게 나는 나의 연락처와 차비를 하라며 만 원을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몹시 고마워했다. 몇 번이나 머리를 주억거리며 어둠 속에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집사님들에게서 "하여간 우리 목사님 사모님은 못 말려!"라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마지막 손님이 우리를 기쁘게 한 것은 꼭 목회자여서만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손님 #사택 #저녁 식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4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5. 5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