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지연
프로젝트 구상은 10년도 더 전부터 시작됐다. 극장도 잡을 수 없어 대관으로 개봉했던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이 전국 30만 관객을 동원하며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흥행을 거두었던 1996년, 김수정 감독은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같은 시기 개봉했던 디즈니사의 <노틀담의 꼽추>는 호기롭게 전국 60여 개 극장에서 개봉했지만 35만을 모으는 데 그쳤었다.
그러나 이듬해 IMF가 찾아왔고, 새 작품에 대한 투자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저 구상과 시나리오 작업 등을 조금씩 해가던 어느 때, 작업에 탄력이 붙게 된 것은 지난해 말 이 프로젝트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2007 우수파일럿으로 선정되면서부터다.
새 작품 제작은 늦어졌지만 TV시리즈와 극장용 장편의 성공으로 캐릭터의 인기는 불이 붙은 상태였다. 둘리와 그의 친구들은 그 유명한 '둘리 소시지'를 비롯해 봉제인형, 문구, 최근에는 한방병원 캐릭터까지 누계 1500여 종의 라이선싱 상품으로 거듭났다. 또 뮤지컬, 사회사업 주인공 등으로도 변신해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둘리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부천시가 둘리에게 주민등록증을 전달하며 국내 캐릭터 사상 최초로 주민등록증을 받은 캐릭터가 됐고, 최근에는 서울 도봉구민 명예호적을 받기도 했다.
'둘리' 캐릭터의 꾸준한 인기 속에 둘리나라(대표 유미희)는 새 작품 제작비용을 마련했고, 최근 SBS, 투니버스 등과 투자계약까지 마쳤다. 내년 가을께 방영될 예정인 이 작품은 현재 시나리오 마무리 작업 중이다. 22분물 26편짜리의 총제작비가 28억 원. 편당 1억 원이 조금 넘는 규모다.
새 작품에서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드라마틱한 이야기' 즉 스토리 그 자체다. 만화를 그릴 때도 그랬던 것처럼. 비주얼의 화려함보다 이야기 구조의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싶은 것. "TV도 그렇고, 극장용도 드라마가 많이 실종된 상황이에요. 저는 작가로 출발해서인지 그런 부분들이 상당히 미흡해 보입니다. CG의 화려함보다 이야기가 우선이라 생각해요. 코미디든 뭐든 일단 이야기 구조가 돼야 하죠. 그리고 개그 하나까지도 작가가 의도한 방향대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비주얼을 등한시할 리 없다. '둘리', '고길동', '도우너', '또치', '희동이', '마이콜' 등 그의 완성도 높은 캐릭터들은 편당 11000매가 이뤄내는 다이내믹하고 복작거리는 화면 속을 분주히 뛰어다니게 된 거다. 보통 애니메이션은 편당 6000~7000매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역동적인 화면 역시 기대해볼 만하다.
디즈니코리아가 관리를 원한 캐릭터 '둘리'
오랜 세월 장수 캐릭터로 사랑받으면서 사실 '둘리'네 캐릭터들도 모습이 조금씩 변했는데, 때문에 김수정 감독은 고민도 많았다. '만화 원작 그대로의 오리지널 둘리로 할 것인가, 조금은 다른 팬시화한 앙증맞고 귀여운 둘리로 할 것인가.' 오랜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가장 만화다운 둘리'. 20여 년 전 만화잡지 <보물섬>에서 태어난 그때의 둘리다.
"굉장히 고민했어요. 팬시에 길들여진 분들은 둘리에 대해 귀엽고 앙증맞은 것에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고, 또 둘리 마니아들은 '정통' 둘리를 원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을 되짚어 보면서 과연 둘리다운 게 뭔가 하는 고민을 했죠. 그러다 알게 됐어요. 아, 그것은 가장 원천적인 것이구나, '둘리다운'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이구나 하는 걸요. 작가적 입장에서, 우리가 최초에 독자들과 공유했던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더 편하고, 그게 더 신바람 나죠.(웃음) 또 하나,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그 자체로 공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죠. 만화의 캐릭터와 팬시상품의 캐릭터 모두를 말예요. 우리 캐릭터 산업 자체가 이미 다양해졌으니까요."
빙하를 타고 내려온 이 초록색 아기 공룡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대한민국 국민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게 됐다. 그리고 어느덧 대한민국 캐릭터를 대표하는 '거물'이 됐다. 그 인기는 디즈니코리아에서도 '관리'를 원했을 정도였다.
새 애니메이션 제작을 앞둔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부분을 알고 그것을 채워주는 일이었다. 세계시장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모션도 중요하지만 보다 애니메이션다운 애니메이션을 보이자는 것. 우리 애니메이션계가 막대한 투자비용 때문에, 검증되지 못한 캐릭터로 인한 위험비용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있는 건 아닌지 혹은 '얼치기'가 되는 건 아닌지 그 스스로도 경계한다. "속으로야 미국을 강타하고, 깨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얼치기 미국식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는 것.
그는 일부 우리 애니메이션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해외 여러 나라에 수출됐다는 애니메이션들을 보세요. 밥이 아니라 샌드위치가 나오고, 숟갈 젓갈 대신 포크 나이프가 나오죠. 외국 가서 달러를 벌어온다고 우리나라 문화 자체를 수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OEM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와는 반대의 사례로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기도 했다. "기모노, 일본 음식 당당하게 나오죠. 비단 만화나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그래요. 그러니 다들 스스럼없이 기모노 입고 일본문화를 자기 머릿속에 잡아넣죠. 그 덕에 소니, 혼다, 미츠비시도 자연스레 퍼져 나갈 수 있는 것이고요. 저변에 깔린 일본문화를 등에 업고 가는 것이죠."
<2008 아기공룡 둘리>는 이미 지난 3월 MIPTV에서 해외 배급사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은 바 있어 제작 이후의 행보 역시 주목되고 있다. "26부작으로 시작하지만 이미 52부작 제작에 대한 협의도 끝난 상태입니다. 성공한다면 78편, 100편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이야기는 충분하다. 그가 10여 년을 넘게 연재했던 만화 <아기공룡 둘리>가 있으니까.
무엇보다 국내에서 먼저 사랑받는 작품이 되고자 한다. 그가 오랫동안 바란 것은 우리 어린이들의 정서에 맞는 '진정한 우리 애니메이션'이었다. 일본, 미국 애니메이션에 치여, 혹은 국적 없는 애니메이션을 봐야 하는 어린이들의 처지를 그는 항상 마음 아프게 여겨왔다. 어쩔 수 없는 작가적 기질 덕에 "14분짜리 파일럿 필름 하나 때문에 1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가야 했고, 언제나 스태프들 설득에 입이 닳지만 떼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래도 돈을 좀 벌어야 하는 이유는 오로지 차기작을 만들기 위해서다.
"지난번 뮤지컬 <아기공룡 둘리>를 했을 때 다섯 살 정도 된 아이가 둘리 풍선을 손에 들고 좋아하는 걸 봤어요. 그만큼 천진한 아이가 둘리를 좋아해주는 게 너무 좋았습니다.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 아이들한테 자긍심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 애니메이션이 너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에 너무 기가 죽어 있어요. 제가 우리 아이들의 눈에 맞춰야 한다는 이유도, 제가 애니메이션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한테 제가 무얼 해줄 수 있을까요."
그의 눈시울이 끝내 붉어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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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니메이션, 일본에 너무 기죽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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