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 치열한 삶과 야구 그리고 조국

[서평] 복간된 장훈 자서전 <일본을 이긴 한국인>

등록 2007.09.13 14:07수정 2007.09.1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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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만, 귀화하는 사람을 뭐라고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개인의 생각 나름이라고 봅니다. 그 사람이 돼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이 성공하면 그것으로 좋은 것 아닙니까. 제가 막을 권리도 없죠. 사실 처음에는 가능하면 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이런 좋은 나라가 세계에 없으니 하지 말라'고 합니다."

 

조국은 함께 달리지 않았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60년대와 70년대를 건너오면서 단지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온갖 멸시와 냉대 그리고 지독한 가난. 그러나 장훈은 결코 귀화라는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죽 한 번 먹지 못하고 죽어가는 누이를 피눈물을 흘리며 바라봐야 했고 자신 일생의 소원이었던 고시엔의 꿈을 접으며 분노해야 했던 장훈에게 귀화가 결코 변절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 사나이는 귀화를 하지 않고 그 치열한 전쟁터 한 가운데를 온몸으로 뚫고 건너왔다.

 

그렇게 온갖 차별을 온몸으로 견디며 일본 프로야구 23년간 통산 2752경기에 출장해(3위) 3085개의 안타(1위)와 504개의 홈런(7위), 1676타점(4위) 을 기록, 일본 프로야구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장훈(일본명:하리모토 이사오).

 

그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나라 대한민국이 자신과 함께 달려줬기에 생사를 넘나드는 그 여정이 결코 힘들지 않았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하지만 조국은 그와 함께 달리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장훈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겠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장훈은 잊힌 영웅일 뿐이다.

 

지금 이땅에는 미련하리만치 고독했던 영웅 장훈을 기념하는 기념관이나 'No.10' 등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파는 조그만 부스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일본땅에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3000안타를 때려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전에 필자는 장훈을 기억하지 않는 답답한 한국야구계에 대한 기사를 수차례 <오마이뉴스>에 올리면서 자조섞인 물음을 하곤 했다. 지금 당장 서점에 가서 장훈에 대한 책을 단 세 권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이 나라 야구계는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영웅을 기억하지 않는 야구는 죽은 야구라고.

 

장훈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나라라고 자랑스러워 하는 조국에서 장훈의 어떤 발자취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복간된 장훈 자서전 <일본을 이긴 한국인>

 

앞 그림 ⓒ 평단문화사

앞 그림 ⓒ 평단문화사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최근까지 남아있다가 절판된 장훈의 자서전 <일본을 이긴 한국인>(성일만 엮음·평단문화사)이 새 옷을 갈아입고 복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서점에 달려가면 당장 책 한 권은 구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니 필자에게도 또 장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눈물나게 고마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책 표지가 고급스럽고 산뜻하게 바뀌었고 이전에는 없었던 사진도 상당부분 보강이 되어 예전과는 다르지만 눈물나게 치열했던 장훈의 삶은 그대로였다.

 

어린시절 오른손에 화상을 입어 손가락 두 개가 붙어버린, 야구선수에게는 치명적인 장애를 피나는 훈력으로 극복해내며 최고의 야구 선수로 자라난 장훈, '조센진'이라며 멸시하는 일본인들을 주먹으로 두들겨패 '단바라의 깡패'로 악명을 떨쳤던 반항아 장훈.

 

10대시절 장훈의 두 가지 모습속에서 장훈이 앓았던 사춘기 성장통이 흔한 사랑의 열병 따위가 아닌 '야구'와 '조국'이었다는 사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조센진 따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우승할 수 있다'는 감독의 결정으로 일생의 꿈이었던 고시엔 출전이 끝내 좌절되던 날, 밤새 양손에 살갖이 벗겨져 피가 범벅이 되도록 분노의 방망이를 휘두르며 '도대체 나에게 조국이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장훈이 마침내 그저 피상적으로 다가왔던 조국을 첫 방문하면서 받았던 감동을 통해 혼란을 딛고 외로운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과정도 그려져 있다.

 

감동…그렇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내 온몸을 전류처럼 꿰질렀다. 공항의 환영인파. 한국 고교생 밴드가 연주하는 '아리랑' '도라지'. 그것은 히로시마의 한인촌에서 들은 노래였고 자장가 삼아 어머니가 들려주던 노래였다. '내가 들으면서 자란 노래….' 이런 생각이 들자 찌르르 등줄기에 전해져 오는 것이 있었다. 잊었던 민족의 피가 몸 안에서 부르르 떨며 끓어올랐다.

 

일본 프로야구단에 입단을 하며 거액의 계약금을 안겨드렸지만 '귀화를 해야만 야구를할 수 있다'는 소식에 "편하게 살자고 조국을 버리는 그따위 짓을 하려거든 당장 야구를 때려치고 히로시마로 내려와라!"고 호통을 치시는 어머님 박순분 여사의 뜨거운 민족애가 오늘의 그를 만들었음을 장훈은 자서전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이제 영웅과 함께 달려주기를...

 

장훈은 1980년 5월 28일 일본 프로야구에서 전무후무한 3000안타를 달성했다. 그러나 23년간 박수만 받고 뛰어도 모자랄 것 같은 기록을 세운 장훈이 일본에서 받은 것은 박수와 환호가 아니라 질투와 야유였다.

 

일본에서는 '조센진' 장훈이라 불리며 차별받고 한국에서는 일본 프로야구 선수 '하리모토 이사오'라 불리며 잊혀가는 장훈.


이제 조국이 이 고독한 영웅의 곁에서 함께 달려주기를 바란다. 수많은 길들 중에 가장 외로운 길을 선택했지만 자랑스러운 조국이 함께 달려줬기에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복간된 장훈 자서전 <일본을 이긴 한국인>이 그 소중한 걸음의 작은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도서정보 <일본을 이긴 한국인>/지은이 장훈,옮긴이 성일만/평단문화사

2007.09.13 14:07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도서정보 <일본을 이긴 한국인>/지은이 장훈,옮긴이 성일만/평단문화사

일본을 이긴 한국인

장훈 지음, 성일만 옮김,
평단(평단문화사), 2007


#장훈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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