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긴박했던 사고를 말없이 보여주는 깨진 렌즈. 교체하는데 무려 280달러나 들었다.
문종성
자전거 뒷 휠은 어찌나 휘었던지 평탄한 길에서도 좌우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게다가 내리막이니 균형을 잡지 못하는 주행도 불안하고 마음까지 불안해집니다. 결국 또 한 번 굴렀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흙이 많은 작은 나무쪽으로 굴러서 첫 번째 보다는 덜 위험했지만 펑크가 나버려 임시 수리를 해야 했습니다.
아, 이제는 다운힐이고 뭐고 얼른 내려가고자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서 그런지 날씨는 더욱 쌀쌀하게 느껴지더군요. 사실 페달 한 번 굴려보지 않고 거의 무임승차로 다운힐을 즐겨보겠다는 그 욕심이 화를 자초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계속 브레이크를 잡았음에도 시속 30km이상이 찍혀 급커브나 맞은편에서 차라도 지나치면 조마조마 합니다.
맞은 편에서 오는 빨간 승용차를 보고서도 내 뜻대로 핸들을 돌릴 수가 없으니 자전거가 말 안 해도 메롱(고장) 상태입니다. 그렇게 40분간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내려왔습니다. 록키산맥의 다운힐은 실로 고수 라이더들에게나 가능한 위험한 도로입니다.
사고 후유증에 의기소침, 결국 유혹에 넘어가고...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또 자전거 역시 심한 데미지 상태였기에 오랜만에 히치 바이킹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도로에서 손을 흔들자마자 바로 차 한 대가 멈춰 섭니다. 그리고는 다음 타운까지 태워주기로 약속합니다.
그의 이름은 메이즐(Meisel). 사고를 당한 저를 위로하지만 한국처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쾌하게 기분을 풀어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다음 타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비가 내립니다. 이때 그가 유혹해 옵니다.
"근데 자네 오늘 뭐 좀 먹은 게 있나? 저녁은 어떡할려고? 우리 집에 가면 이런저런 음식과 치킨으로 만든 메인 메뉴가 있는데. 어때?"메이즐의 제안이 싫지만은 않지만 괜히 한 번 한국인 특유의 거절신공을 발휘해 봅니다.
"아휴~ 괜찮아요. 저녁이야 뭐 어디 레스토랑이라도 찾아서 먹으면 되요."그러면서도 한 번 쯤 더 그가 제의해 오길 내심 바랍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해 줄줄 아는 미국인이었기에 여기에서 그냥 '알았다'고 하면 괜히 허탈해 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듯이 말합니다.
"인터넷도 마음껏 할 수 있는데 말야. 자네 여행기 써야 한다며?"점점 그의 유혹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사고 났는데 무리하면 못 쓰지. 우리 집에 방이 몇 개 비어 있는데 거기서 푹 쉬다 가요. 몸도 그렇고 자전거 정비도 해야 될 것 아니야? 렌즈도 다시 구입하고. 어때 자네 생각은?"이럴 때 체면은 저 아래 지구 내핵까지 묻어두는 게 상책입니다. 그에게 살짝 웃어보이며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유혹을 핑계로 몬트로즈(Montrose) 집까지 가는 60마일의 도로를 그냥 건너 뜁니다. 자전거로 오르락 내리락 열나게 밟아야 할 그 길을 말입니다. 그리고선 어디서 많이 듣던 말로 혼자 괜히 정당화시킵니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닌 방향이야!' 그렇습니다. 치킨과 인터넷은 감히 자기 합리화를 시킬 줄 아는 최고의 유혹의 덫인 셈이었습니다.
이런! 저녁 요리가 환상입니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각기 다른 치킨 메인 요리 두 개와 각종 서브 메뉴에 과일과 빵과 아이스크림의 화려한 향연이 끊임없이 이어진 에피타이저와 디저트의 완벽한 하모니. 일반 가정집이라곤 너무나 황홀한 저녁 식사에 입이 딱 벌어집니다. '저 동방예의지국에서 왔어요' 라는 티 낼려고 조심 그리고 조신하게 먹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자꾸 포크는 입과 음식 사이를 벌새의 날개짓 속도로 왕복운동을 해댑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깔끔함을 잃지 않으려 냅킨을 자주 사용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기만 합니다. 역시 난 호기심과 도전 정신으로 즐기는 길거리 음식과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후즐근한 식당에서 먹는 보다 거친 습속이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간만에 포식했습니다. 나이 예순을 넘긴 교양있고 상냥한 부인의 음식 솜씨가 과연 수준급입니다. 젊었을 때 직업이 요리사였냐고 음식 솜씨를 칭찬하니 매우 흡족해하며 치킨을 더 갖다 줍니다. 부인이 닭 날개를 집어 자신의 접시에 놓습니다.
"부인, 한국에선 말이죠, 닭 날개를 먹으면 바람을 핀다는 말이 있어요."
가볍게 던진 농담에 부인이 놀라워하며 남편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메이즐 역시 조금 당황한 기색이 보입니다. 시의적절치 못한 농담이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재빨리 사태를 수습합니다.
"실은 닭 날개가 가장 연하고 맛있는 부위라서 그런 거에요. '이거 먹으면 바람 핀다구!'라고 큰소리 쳐 놓고 사람들이 꺼려할 때 그 때 자신이 낼름 그걸 집어가는 거죠. 하하."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부부가 안심하고 날개를 맛있게 먹습니다. 식사 시간 내내 나의 준비된 여행 만담 즉 레퍼토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이런 이야기 보따리 하나 풀 정도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기에 대화할 때 어색한 침묵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록키산맥 넘어올 때 힘들지 않았나요?"
"힘들긴 했는데 풍경이 너무 좋아서 좋더라고요. 중간에 가스 스테이션이나 음식점이 없긴 했지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서 별 어려움은 없었고요. 뭐 조금은 우려했지만 그래도 곰이나 퓨마를 만나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죠. 아,그런데 말이죠. 만약 내가 야생동물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세요.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떻게 하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질문에 메이즐 부부는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글쎄요. 어떻게 확인이 되죠?""음, 만약 제가 야생동물을 만났다, 그런데 그 후 제 이름이 신문에 나오면 죽은 것이고, 가이드 포스트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오면 구사일생으로 산 것이죠."보통 신문에는 사망사고가 가이드 포스트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는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가 자주 실리기에 빗댄 유머였습니다. 메이즐 부부가 재치있는 답변에 웃고 나도 농담을 한 것이 쑥스러워 웃고…. 이렇게 세 사람의 저녁식탁은 여러 이야기로 즐겁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