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을 이렇게 만들다니

추리무협소설 <천지> 276회

등록 2007.09.19 08:22수정 2007.09.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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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급히 지공의 뒷머리를 자세히 살폈다. 흔적이 있었다. 뇌호혈(腦戶穴)에 미세한 자국이 있었던 것이다. 뇌호혈은 사람의 이지(理智)에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사혈이다. 뇌호혈이 다치거나 망가지면, 미치거나 이지를 잃어버린 백치 상태가 되기도 하고 심하면 뇌의 충격으로 절명하게 되는 혈이다.

‘고수다.....!’


허나 천과가 놀란 것은 뇌호혈에 남아 있는 흔적 때문이었다. 원인을 알아냈다는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 뇌호혈의 흔적이 그의 동공을 파고들면서 머리털을 곤두서게 할 만큼 충격으로 와 닿았던 것이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혈을 짚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치명적인 사혈을 짚을 때 단지 죽이고자 한다면 일류급 고수들도 가능하다. 허나 혈을 짚음에 있어 힘과 속도, 그리고 기의 운용을 조절하여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특히 뇌호혈은 사람의 이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혈로 파괴하기는 쉬워도 이런 상태로 만드는 것은 절대고수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더구나 혈도를 짚음에 있어 시전하는 자가 상대보다 월등하게 무위나 내공이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지공이나 손번 같은 고수들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고수가 동정오우 말고 또 있다니 놀랍군.”

어느새 다가온 상만천이 안력을 돋우어 손번의 뇌호혈까지 세밀하게 살피는 천과의 뒤에서 중얼거렸다. 동정오우 중 나머지 세 사람이 운중각에 모여 있다는 사실은 이미 보고 받은 터. 그들이 그랬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지공과 손번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가 있다는 결론이다.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무서운 고수가 이 운중보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 왔다. 허나 좌중은 그러한 흔적을 한 눈에 알아보고 있는 상만천의 능력에 대해서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적어도 천과보다 뒤지지 않는 무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무당의 청송자(靑松子)와 점창(點蒼)의 사공도장(四空道長)이 동시에 새삼스레 놀란 듯한 눈길로 상만천을 바라보았다.


‘변수(變數)....가 있었다.....!’

이런 일까지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 지하로 들어가는 지공과 손번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한 것은 아니었다. 지하에 도대체 누가.... 그리고 무엇이 있는 것일까? 자신들이 쫓는 함곡일행은 이 생사림이 아니라 생사림 지하에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욱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돌발적으로 튀어나왔을 때 오히려 더 당황하는 것이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는 족속들이다.

“이제 거의 진을 걷어낸 것 같군.”

이미 천과의 뒤에서 지공과 손번의 상태를 파악한 상만천이 용추의 어깨를 치며 말하는 바람에 용추는 정신을 차렸다. 희뿌연 안개로 덮여있던 생사림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아니.... 그 왼쪽 나무...!”

용추가 진의 제거를 맡고 있는 교두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큰일이야 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잘 못 건드리면 여진이 남아 고생을 하게 된다. 이렇듯 조금만 신경을 늦추어도 다른 것을 제거하려 하는 통에 용추는 지공과 손번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굵은 나무만 골라서 잘라내면 되는 것으로 믿는 것 같았다. 사실 방향은 엇비슷했기 때문에 진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헷갈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제 몇 군데만 손을 보면 생사림에 내려앉은 안개는 모두 사라지고 일반 숲과 마찬가지가 될 터였다.

문제는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지하였다. 함곡일행이 지하로 들어갔다면 지금까지의 고생은 헛수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허나 용추는 이미 생사림 중앙에 인기척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바람에 실려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분명 함곡일행일 터였다. 허나 그 점이 더욱 그를 불안하게 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모든 일은.... 더구나 상대가 있는 일은 언제나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쉬워진다. 다만 역지사지란 것이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려치 않고 상대의 입장이 된 상태에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역지사지란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나라면 되도록 일행의 발길을 늦추기 위해 중간 중간에서 장난을 쳤을 것이다. 아니 이쪽에게 되도록 피해를 주어 전력을 약화시키려고 기습이라도 했을 터였다. 헌데 그런 것쯤을 모를 리 없는 함곡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있다는 말인가? 용추 자신이 진을 모두 파훼하는지 시험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자신이 함곡을 알고 있듯이 함곡 역시 자신을 잘 알고 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

“우슬 소저도 구룡과 관계가 있소?”

지금 묻지 않는다면 더 이상 물을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심증은 가는데 구룡 중 누구와 관계가 있는지 정확히 짚어내기 어렵다. 함곡의 질문에 우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함곡의 눈을 피하기 어렵다.

무화가 입을 열려는 우슬을 보며 눈짓을 했다. 되도록 대답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표정이다. 그것은 귀산노인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우슬은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열었다.

“관계가 있어요. 구룡 중 한 분이신 잠룡이 제 사부님이시죠.”

“잠룡....?”

우슬의 말을 받아 곧바로 뇌까린 풍철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잠룡은 동정호 군산혈전 이전에 이미 돌아가신 분이오. 그 분의 독문비급을 얻어 익혔다면 모를까.... 허... 그것도 말이 안 되지.”

풍철한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허나 잠룡이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그의 무공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풍철한의 반응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왜죠?”

우슬이 매우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풍철한이 우슬이 오히려 놀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허... 나는 자세히 알지는 못하오만.... 잠룡... 그 분의 무공은 일반적인 무공이 아니라고 들었소. 특이한 심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면 그 분의 무공을 익힐 수도 없고.... 그 때문에 그 분 살아생전에 아무리 뒤져도 그 분의 맥을 이을 아이가 없었다고 들었소.”

“맞는 말씀이세요.”

우슬이 동의하자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풍철한이 말을 이었다.

“더구나 그 분의 독문비급이 있더라도 직접 교수(敎授)하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것이 그것이라 들었소. 그런데 이미 돌아가신 지 이십칠팔 년이 넘은 그 분의 무공을 우슬 소저가 익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거요.”

“아주 자세히 알고 계시네요. 풍대협께서는 역시 견문이 매우 넓으시군요.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어요.”

“...........?”

“사부님은 아직까지 생존해 계세요. 바로 여기 운중보 안에 말이죠.....”

그 말에 풍철한은 물론 그의 형제들과 함곡까지도 해연히 놀라는 모습이었다.
#천지 #추리무협 #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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