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름다워, 남들이 뭐라 말하든

팝송으로 영어를 가르치다 아이들에게 박수를 받은 사연

등록 2007.09.23 09:09수정 2007.09.2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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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길과 아이  한 아이가 길 위에 앉아 있다. 아름답다. 홀로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길과 아이 한 아이가 길 위에 앉아 있다. 아름답다. 홀로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 안준철



수업을 하다가 학생들로부터 박수를 받는 일은 참 드문 일이다. 그 드문 경우도 대개는 아이들의 얄팍한 계산에서 나온 수작일 가능성이 많다. 요즘 아이들이 그렇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생각이 짧고 감정적인 것은 참아줄만한데, 순수하지가 않다. 진실의 반응속도가 너무 느리다고나 할까? 

팝송으로 영어를 배우는 영어 보충 시간이었다. 그날 내가 칠판에 가득 적어놓은 팝송 제목은 'Beautiful'이었다. 아이들이나 나나 처음 듣는 곡이었다. 방학 동안에 애써 골라놓은 곡들은 템포가 느리고 처진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퇴짜를 놓은 것이다. 다행히 가수의 음색이나 창법이 퍽 매력적이었다. 아이들도 괜찮다는 반응이었다. 문제는 가사였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매일 한결같이 너무 행복해
그러다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오는 거야
이젠 불안하기까지 해
이런 모든 고통으로 인해 정말 창피할 뿐이야

난 아름다워
남들이 뭐라 말하든
어떤 말도 날 좌절하게 만들지 못해
난 아름다워

'모든 고통으로 인해 정말 창피할 뿐'이라면서 느닷없이 '난 아름다워'라니? 처음 노래를 고를 때도 혹시 번역에 문제가 있나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궁금증이 일어 얼른 우리말로 번역된 가사를 끝까지 읽고 난 뒤에야 나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유독 내 시선을 끈 대목이 있었다.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퍼즐이 완성되지 못한 채
퍼즐 조각들은 어디론지 사라졌어
언제나 그런 식이지


넌 아름다워

하지만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광수(가명) 때문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광수의 풀린 눈빛 때문이었다. 물론 수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눈이 풀려 있는 아이들이 종종 있다.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은 교사의 몫이기도 하다.


하지만 광수의 경우는 얘기가 좀 복잡하다. 광수는 원래가 생기발랄한 녀석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일정한 주기를 탄다는 것이 문제이다. 지나치게 생기발랄하거나 아니면 눈이 완전히 풀어져 있거나.

나는 수업을 할 때 한 가지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한 아이라도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면 수업을 잘 진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를 포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인데, 그러다보니 수업이 자주 끊기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은 그런 단점을 많이 극복하고 있는 편이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떠들거나 딴 짓을 하고 있는 아이가 있으면 수업을 계속 진행하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깐 서 있다가 다시 앉는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이름을 부른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는다. 그런 식으로 서너 번만 하면 수업을 멈추지 않고도 아이들을 지도할 수가 있다. 물론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a 뛰노는 아이들 초원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아름답다. 함께 어울려 있어서 더 아름답다.

뛰노는 아이들 초원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있다. 아름답다. 함께 어울려 있어서 더 아름답다. ⓒ 안준철



그날 광수는 열 번도 더 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 처음에는 비몽사몽간에 기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하더니 차츰 머리를 흔들며 자신을 일깨우는 모습이 역력했다. 수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과는 달리 아이들의 눈빛도 차츰 진지해져갔다. 드디어 그 대목이 왔다. 그런데 때마침 광수의 눈이 또 풀어지고 있었다. 나는 광수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목소리가 커졌다.

"광수야, 눈 떠. 눈 떠라. 선생님이 네 이름을 열 번도 더 불렀을 거야. 그때마다 넌 아무런 불평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어. 만약 네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난 널 때리지 않았을 거야. 그걸 넌 알고 있지. 그런데도 넌 선생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어. 넌 훌륭한 거야. 넌 아름다워. 넌 충분히 아름다워. 그러니까 이제 눈 떠라. 꼭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지금 바로 그 대목이야."

드디어 광수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녀석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서 수업을 받겠다고 했다. 나는 광수와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뜨겁게 입을 열었다.

"퍼즐이 완성되지 못한 채 퍼즐 조각이 사라져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퍼즐을 꿈이라는 단어로 바꿔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요. 꿈이 완성되지 못한 채 꿈 조각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언제나 그런 식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절망의 지속은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가요? 그런데 '넌 아름다워'라니요? 왜요? 왜 아름답다는 거지요? 아름다울 것이 쥐뿔도 없는데. 늘 그 모양 그 꼴인데.

여러분, 여러분은 아름다워요. 여러분이 공부를 조금 잘하고 못하고는 여러분의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큰 잣대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내가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의 선언일 수 있어요. 아름답게 살겠다는 선언. 여러분도 내가 아름답다고 선언해보세요. 그리고 내가 선언한대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거예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잖아요. 오늘부터 아름답게 살면 되는 거잖아요."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이 때였다. 정말 뜻밖의 순간에 뜻밖의 아이가 박수를 쳤고, 곧이어 서너 명의 아이가 합세를 하더니 박수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박수를 쳤지만 정작 박수를 받아야할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철없이 보이는 아이들. 진실에 대한 반응속도가 너무 느려 가끔은 나를 속상하게 하는 아이들. 하지만 진실이 살아있는 아이들.

그들이, 아름다운 그들이 박수를 받아야할 주인공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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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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