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실린 김기원 교수의 글 그는 '한국의 랠프 네이더는 필요 없다'는 글을 통해 비판적 지지론을 주장했다.
한겨레21
현재의 '비판적 지지론' 논란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비판적 지지론의 시초는 1987년 대선에서 나타났다. 이때부터 시작된 '비판적 지지론'은 이른바 운동권 내에서 특정 세력의 입장과 연관된 것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 등으로 정치적 입장이 나뉘어졌다. 운동권 내에서 우파적 성향으로 분류되는 세력이 '비판적 지지론'을 설파했고, 좌파적 성향의 운동권은 독자후보론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 이후부터 운동권 좌파들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약칭하여 '민독정'을 외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기존 보수정당들과 구분되는 독자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2년 대선에서 과거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을 계승했던 운동권 다수파 조직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당시 민주당 김대중 후보와의 정책연합을 추진하면서 또다시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훗날 YTN 사장을 역임한 장명국씨는 당시에 '당선 가능한 야당후보 지지론', 이른바 '당가야' 노선을 제출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비판적 지지론의 변형된 이름에 불과했다.
1992년 대선에서 좌파들은 비판적 지지론을 비판하며 독자후보 노선을 택해 백기완씨를 민중후보로 추대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이 때 백기완 후보는 일부의 극렬 비판적 지지론자들로부터 '미제의 간첩', 'CIA의 첩자'라는 소리까지 들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이들이 물리적으로 백기완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1997년 대선에서도 비판적 지지론은 여전히 건재했다. 운동권 일부 인사들이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을 모태로 한 '국민승리21'은 권영길 후보를 내세워 대선을 독자적으로 돌파했다. 여기에는 과거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에 가까웠던 세력들까지 참여했다.
그리고 국민승리21이 주도하여 1999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과거 독자후보론, '민독정'을 외쳤던 사람들과 비판적 지지론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함께 독자적인 당을 결성함으로써 1997년 대선 이후 과거 운동권에서 통용되던 비판적 지지론 혹은 민독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한편, 민주노동당 창당보다 앞서 국민승리21의 국민후보 노선을 비판한 좌파 청년들은 1998년 청년진보당(현재 한국사회당)을 창당했다.
양강 정치 구도 속에서 매번 작동하는 비판적 지지론자신의 당이 있고 후보도 있는데, 다른 당의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 이후 비판적 지지론이 움틀 둥지는 사라졌다.
따라서 대선 때마다 매번 등장하는 비판적 지지론은 어떤 특정 세력의 입장과 연결 짓기는 어렵고, 양강 정치 구도 속에서 항상 작동하는 고유한 논리 구조로 보면 된다. 이것은 '사표심리'와 '전략적 투표 행위'로 설명 가능하다. 사표심리란 내 표가 당선이 안 되는 후보에 감으로써 죽은 표가 된다는 의미고, 전략적투표(strategic voting)란 유권자가 가장 선호하는 후보자가 당선 가능성이 희박할 경우 차선의 후보를 선택한다는 것을 말한다.
양강 정치 구도, 특히 대통령 선거라는 국면 속에서 이러한 논란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재의 대통령제가 지속되는 한 제3후보 이하의 후보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논란이다. 당선자를 한 명 뽑는 선거에서 사표심리가 발동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리고 당선가능성에 근접했거나 근접할 것으로 기대되는 후보 진영이 사표심리를 이용하여 전략적 투표 행위를 독촉하는 것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도덕한 정치공작이 개입된 것이 아니라면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다. 현행 선거 제도에서 제3후보 이하는 비판적 지지론의 덫에 갇힐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때문에 지금 시급한 것은 유권자 선호 왜곡을 일으키는 '비판적 지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선거 제도 개혁이다. 이렇게 시야를 확장해야만 비판적 지지론을 둘러싼 공허한 논쟁을 반복하지 않고 정치 발전에 기여하는 생산적 논의를 할 수 있다.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이 필요하다비판적 지지론을 불식시킬 수 있는 대통령 선거 제도 개혁의 핵심은 단연 결선투표제 도입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범여권 일부, 그리고 진보정치 세력까지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것이 이 제도다.
대통령 결선투표제가 도입되면, 전략적 투표 행위에 의한 유권자 선호의 왜곡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즉, 아무런 복잡한 고려 없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소신껏 투표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결선투표에서는 차선을 택하도록 내몰릴 수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지지의사를 1차 투표에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대통령 결선투표제는 또한 투표자 과반의 지지를 얻는 대통령을 선출하여 국민적 대표성을 높일 수 있고, 정당의 경우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선거연합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럼에도 이 제도의 도입은 정치권에서 전혀 관심 밖이다. 공직선거법 일부개정을 통해 어렵지 않게 이 제도를 도입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원내 의석을 지닌 정당들이 구체적인 개정안 마련에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한국사회당은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일부개정법률안'을 최초로 마련했고, 이것의 공론화와 입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선이 불과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각 정당들이 눈앞의 승부 뿐 아니라 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 등 정치 구조 및 선거 제도 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