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평의회 의장, 발트에서 '공공의 적' 된 까닭

[해외리포트] 러시아계 소수민족 관련 발언에 에스토니아 발끈

등록 2007.10.23 11:23수정 2007.10.2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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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유럽의회 건물 전경. ⓒ 위키피디아


과거청산은 독립 후 16년이 지난 발트3국에서 계속되는 문제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소련 시절 발트3국으로 이주해 현지에 정착한 러시아인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에스토니아는 올해 4월말, 소련 시절 만들어진 청동군인동상 철거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철거 이후 불거진 에스토니아 내 러시아인들의 소요는 1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라트비아에서도 소련으로부터 보상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게 과거의 문제들은 잊을만하면 다시 떠올라, 아물지 못하는 상처처럼 그들 곁에 남아있다.

유럽평의회 의회 의장, 발트3국의 뇌관 '러시아인 문제' 건드리다

9월말 르네 반 데르 린덴 유럽평의회(범유럽 인권기구) 의회 의장이 발트3국을 순회 방문했다. 그러나 이번 방문 후 린덴은 에스토니아 정치인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떠올랐다.

린덴은 이번 방문 중 인구의 3분의 1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인 통합 문제에 대해 각국 정부에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매우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린덴은 에스토니아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고, 에스토니아의 소수민족 정책에 직격탄을 날렸다.

린덴이 이번에 지적한 내용은 소수민족들의 선거참여와 시민권 취득 문제였다. 린덴은 대부분 러시아 이민자인 소수민족들이 에스토니아에서 이뤄지는 선거에 전혀 참여할 수 없으며,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이들에게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린덴이 지적한 사항은 이미 여러 해 전에 개선된 사안들이다. 에스토니아 정치인들이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유는 린덴이 에스토니아 내부 문제를 건드렸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에스토니아는 독립 이후 자국 정책에 대해 외국에서 비평하고 때론 비난하는 것을 대체로 관대하게 받아들였으며, 유럽연합 가입 이후에도 브뤼셀의 조언과 요구사항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인들 사이에서는 린덴의 이번 발언이 에스토니아 사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인데다 근거가 불충분한 것으로서, 다른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발끈한 에스토니아... 여기에다 기름 부은 유엔 특별위원

에스토니아 국회의장인 에네 에르그마는 린덴의 발언 이후 "오류뿐인 내용을 근거로 한 이번 발표가 국제적으로 에스토니아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며 분노에 가득 찬 편지를 즉각 스트라스부르그로 보냈다.


에르그마는 공식서신을 통해 "에스토니아 시민권이 없는 소수민족들 역시 각 지역정부의 선택에 따라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지 오래이며,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15세 미만의 청소년들에게는 부모가 귀화를 신청할 경우 특별한 시험이나 요구사항 없이 에스토니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며 린덴의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더 나아가 "이번 발언은 린덴이 그 직책에 걸맞은 사람인가 하는 의혹이 들게 한다"며 "에스토니아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크리스티나 오율란드 국회부의장 역시 최대 일간지 <포스티메에스>를 통해서 "유럽평회의 의회 의장은 바보 같은 발언을 그만두라"고 요구했고, 유럽평의회에서 에스토니아 대표를 맡았던 인드렉 사아레도 신문을 통해 "조만간 직책을 그만두게 될 린덴의 행동은 아주 이상하고 바보 같아 보인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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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덴 의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보도한 기사. ⓒ 포스티메에스(Postimees)


에스토니아를 자극한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린덴과 같은 시기에 에스토니아를 방문해 실태조사를 벌인 두두 디엥 유엔 특별위원(인종차별주의 및 외국인 혐오실태 조사 담당)은 조사 결과 에스토니아처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사회는 다언어사회를 지향해야 하므로, 러시아어를 공식 언어 중 하나로 지정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발표했다.

린덴의 발언으로 불길이 일어난 에스토니아 소수민족정책 논란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유럽평의회 의회 의장의 발언과 유엔의 특별 실태조사 결과 발표는 에스토니아가 소수민족 통합과 보호 정책을 등한시하는 나라라는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줬고, 이에 에스토니아인들은 분개했다.

토마스 헨드릭 일베스 에스토니아 대통령은 한 지방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디엥의 발언은 수십만 명의 터키인이 살고 있는 독일에서 터키어를 공식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같다"고 반박했다.

린덴 뒤엔 러시아가 있다?... 에스토니아 정치인들의 의혹 제기로 논란 확산

이번 논란은 린덴이 유럽평의회 의회 의장으로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깊은 연관을 맺은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에스토니아를 '비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린덴은 이번 방문 이전부터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에스토니아 정치인들의 반발을 산 적이 있다. 린덴은 탈린의 청동군인동상 철거사건 당시,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룬 성과를 에스토니아는 잘 모르고 있다며 러시아를 옹호했다. 동상 철거 논란 당시 에스토니아에선 이를 린덴의 개인 의견이려니 여기고 심각하게 문제를 삼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사람인 린덴이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은 계속 품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 논란이 벌어지자, 에스토니아 의회에서 대 유럽연합 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조국공화당(IRL) 소속의 정치인 마르코 미흐켈손은 10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린덴이 러시아와 재정적으로 연계돼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미흐켈손은 그동안 린덴과 러시아의 금전적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 그 결과를 개인 블로그를 통해 밝혀왔다.

미흐켈손이 이날 공개한 기록에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인 블라디미르 주 소빈스키 지역에서 진행되는 공단 건설 사업에 린덴이 1억 달러가 넘는 금액을 투자한 후 이사직에 오른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린덴은 자신이 러시아와 경제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주장들을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강하게 부인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빈스키 지역 공단 착공 기념식에 참여한 린덴의 모습이 텔레비전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의혹은 가중됐다.

유럽평의회 의회 결의안 1554조에 따르면, 의회 위원으로 지명되면 업무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위해 자신이 조사, 연구하는 국가와 맺고 있는 금전적, 경제적, 직업적, 개인적 관계를 전부 공개하도록 돼 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미흐켈손이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미흐켈손은 린덴이 러시아와 상당한 금액의 경제적 연계를 맺었음에도, 이를 공개하기는커녕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소수민족 발언 역시 린덴 본인이 관계를 맺고 있는 러시아 관련 문제라는 점에서 린덴이 1554조를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기자회견을 준비할 때 린덴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한 적도 있으며, 그때 린덴이 그런 정보를 얻게 된 출처를 밝히라고 자신에게 요구하는 한편 '거짓정보' 유출을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 미흐켈손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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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당하다'. 르네 반 데르 린덴 유럽평의회 의회 의장이 러시아와 금전적으로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코 미흐켈손. ⓒ 패애바레흐트(Paevaleht)


이에 더해 크리스티나 오율란드 국회부의장은 TV3 채널과 한 인터뷰에서 린덴이 러시아와 재정적 연계를 맺은 사실은 유럽평의회 내에 퍼져있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단언했다. 더 나아가 이대로라면 조만간 러시아가 유럽평의회를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부상할 것 같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린덴은 에스토니아 정치인들이 제시하는 증거자료와 주장에 대해 '근거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양쪽의 주장이 엇갈리지만, 기자가 보기에는 에스토니아 쪽의 증거자료와 논리가 아직까지는 더 신빙성 있는 것 같다.

어쨌건 그동안 국제정치 무대에서 제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에서 터져 나온 이번 사안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주변 강대국들의 목소리에 파묻혀 사라질지, 아니면 유럽 국제질서에 한 획을 그을 만한 중요한 사건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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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에스토니아의 120만 인구 중 러시아계는 약 27%다. 러시아계 중 35%는 에스토니아 언어와 헌법시험을 치르고 에스토니아 시민권을 취득한 반면, 35%는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고, 나머지는 여전히 러시아 시민권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이다.

무국적 상태란 소련 붕괴 이후 특별한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사람들 경우다. 이는 옛 소련에 남아있는 고려인 중 많은 이도 겪고 있는 문제 중 하나로, 에스토니아 인구 전체로 따져보면 8%에 이른다. 그들에게는 정식 국적자들의 여권과는 다른 '이민자여권'이 별도로 발급된다.

에스토니아 국적이 없는 사람들은 국회의원 선거나 유럽의회 선거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영주권을 취득했을 경우 지방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에스토니아는 소련에서 독립한 후, 수백 년 전 동부지역에 이주해 이미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한 러시아인들을 제외하고 소련 시절에 이주해온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귀화하려면 언어시험과 헌법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규정을 담은 이민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은 이에 대해 에스토니아어를 모르는 러시아인들이 시험을 치르기가 어렵고, 러시아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이라며 에스토니아를 비난해왔다.
#에스토니아 #과거청산 #소수민족 #린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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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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