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정치, 금기는 깨졌지만 갈 길 멀다

한귀영 KSOI 실장, "콘텐츠·리더십 갖춘 여성이 뜨고 있다

등록 2007.10.25 15:16수정 2007.10.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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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왼쪽부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한명숙 국무총리,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왼쪽부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한명숙 국무총리,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 오마이뉴스 권우성·이종호·남소연

왼쪽부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한명숙 국무총리,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 오마이뉴스 권우성·이종호·남소연

 

'프랑스 최초의 여성대통령'의 마지막 고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세골렌 루아얄 후보, 미국 첫 여성대통령의 꿈을 일구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 이들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올초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조선일보-한국갤럽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은 "능력이 같다면 여성 대통령도 상관없다"고 답했다. '여성은 여성을 찍지 않는다'는 선거판의 불문률도 깨지고 있다. 여성대통령 시대의 토양이 마련되고 있는 셈이다. 

 

같은 여성이면서 여론조사 전문가인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연구실장은 "이번 대선 만큼 여성 후보들이 약진했던 경우가 별로 없었다"며 "여러 차례 조사에서 여성대통령이 출현하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이 없었다. 그만큼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심상정·한명숙·박근혜에게 부족한 '2%'는?

 

올 대선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한명숙 전 총리,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추미애 전 의원 등이 출사표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모두 예선탈락했지만 한귀영 실장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동안 정치권에 진출했던 여성 정치인들은 비례대표 등 배려 차원이 많았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는 대중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본인의 리더십, 본인의 콘텐츠를 가지고 부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한 실장은 심상정 의원의 '콘텐츠'에 높은 점수를 줬다. 그는 "심 의원의 경우 당내 경선이기는 하지만 어떤 후보들보다 강력한 콘텐츠로서 결선투표까지 근소하게 올라갔다"며 "그냥 여성이 아니라 콘텐츠를 갖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성과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강한 콘텐츠'와 '투사 이지미'가 막판 고비를 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실장은 "심 의원은 너무나 강한 여성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결선투표에서 (권영길 후보에 대해) '정치권 선배이자 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하면서 인간적인 면모와 부드러움·포용력을 보여줬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투사형 이미지로 결선까지 왔지만 마지막 2%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반면 한명숙 전 총리에게 부족했던 2%는 오히려 심상정 의원에게서 찾았다. 한 실장은 "한 전 총리가 심상정 의원처럼 자기만의 정체성과 콘텐츠가 있었더라면 훨씬 더 파괴력이 있었을 것"이라며 "한 전 총리의 장점은 포용력이지만,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한 전 총리가 '소통과 통합'은 잘 할 것 같은데, "저 사람이 되면 어떤 대통령이 될 지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서는 "'여성'이라기보다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미지가 더 컸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표는 애국주의·원칙주의 등 이번 대선에서 그 어떤 남성 후보보다 강인한 면모를 보여줬다."

 

박 전 대표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막판 접전을 벌인 끝에 패한 원인은 뭘까? 한귀영 실장은 "박 전 대표에게도 분명히 정책과 정체성이 있었는데, 경선 국면에서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네거티브로 일관했다"며 "막판에 이 전 시장에 대한 검찰 조사 당시에라도 포지티브를 내세웠더라면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전 시장에 대한 '네거티브전'이 본선이었다면 모르지만 당내 경선에서는 효과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한 실장은 또 "박 전 대표는 1960대 제3공화국에 머물러 있는 이미지를 21세기 전문가형 이미지로, 희생당하는 여성이 아니라 비전을 제시하는 여성으로 바꿨어야 했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한 실장은 이번 대선에 출사표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진보시민사회 세혁의 차기 대표주자"로 주목했다. 여성 후보들이 자신의 장점을 가지고 지지를 호소했던 지지층이 전부 제각각 이라는 점 때문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포근한 모성 이미지를 통해 40대 이상의 중도 성향 지지층을 흡인했다면 박근혜 전 대표는 50대 이상 전통적인 서민층· 보수층에게 어필했다. 반면 강금실 전 장관은 30~40대 화이트칼라 여성들이 자신의 딸의 역할 모델로 바라보는 의미가 있었고, 진보성향 지지층들로부터 계속 의미있는 지지를 받고 있다."

 

a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자료사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올해는 실패했지만 5년 뒤에는 여성대통령이 가능할까?

 

한귀영 실장은 "일단 '여성대통령이 과연 되겠느냐'는 금기의 벽을 깼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서 "내년 총선에서 여성들이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에서 어느 정도 선전하느냐가 바로미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솔직히 아직은 냉소적이다. 여성엘리트 상층에서는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지만 아래로 내려가서는 풀(인적자원)이 형성되지 못했다. 토대나 기반은 마련됐지만 결국 그것을 끌고 갈 여성 정치인, 콘텐츠와 리더십을 갖춘 여성 정치인의 풀이 넓지 않다."

 

실제 올해 대선을 앞두고 여성 대권주자들이 전부 낙마하자, 내년 총선에 나서는 여성 정치인들이 지금보다 더 위축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도 제기됐다.

 

17대 국회의원 299명 중 여성 의원은 43명. 그나마 각 당이 비례대표 절반을 여성 몫으로 배려하면서 그 수가 예년에 비해 늘어난 것이다. 순수 지역구 의원은 단 10명뿐이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도 16개 시·도 광역단체장 중 여성 당선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230개 시·군·구 기초단체장 중 여성은 단 3명에 불과했다.

 

여성 단체에서 "여성대통령 1명, 여성총리 1명보다는 국회의원·장관·행정직 안의 비율이 늘어나 여성이 정치세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2007.10.25 15:16ⓒ 2007 OhmyNews
#여성대통령 #강금실 #박근혜 #심상정 #한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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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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