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가는 길을 자전거가 못가다니...

[환경을 생각하는 자전거 전국 여행 여덟 번째] 인천에서 화천까지

등록 2007.10.30 09:30수정 2007.11.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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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 호수공원의 완벽한 자전거전용도로 일산 호수공원 ⓒ 이규봉


인천을 출발하여 오두산전망대와 임진각을 거쳐 민통선 가까이 달렸다. 철원을 지나 화천까지 2박 3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갔다. 이제 우리나라 육지의 외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구간 중 화천에서 평화의 댐을 지나 진부령을 넘고 고성 통일전망대를 북쪽 끝으로 속초를 거쳐 강릉에 도착하는 마지막 구간만 남아 있다.

10월 12일 대전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길이 막혀 예상보다 늦게 인천에 도착하였다. 10시에 인천고속버스터미널을 출발하여 남동로와 46번 만수로를 타고 부천을 지나 남부순환로로 들어섰다. 자전거로 건널 수 있는 한강의 최북단 다리인 행주대교를 건너자 고양시가 나온다. 인천을 지나 고양시까지 가는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복잡한 도심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무척 신경을 써야 했다.


고양시에서 일산으로 가는 호수로로 들어서니 일순 복잡함이 사라지고 주변이 한산해졌다. 좋다는 말만 듣던 일산 호수공원에 도착하니 정말로 아름답고 휴식을 취하기에 아주 좋은 공간이 펼쳐 있다. 1996년에 개장된 이 공원은 잠실 석촌호수의 4배에 이르는 인공호수로 30만여 평의 공원에 수많은 나무와 넓은 잔디광장, 팔각정, 야외무대, 보트장, 자전거 전용도로, 야외 식물원, 어린이 놀이터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호숫가 주위에는 산책로와 분리된 완벽한 자전거전용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자전거 이용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자동차 사용이 줄어 대기오염을 상대적으로 줄이는 친환경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예산이 들더라도 이와 같은 자전거전용도로를 설치해야 한다. 이에 비하면 전국의 인도에 설치된 자전거도로는 보여주기 위한 행정으로 대표적인 예산 낭비의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호수공원 대신 아파트를 세웠다면? 당시 정책입안자 혜안에 감탄

이 호수공원을 만드는 대신 이 자리에 아파트를 세웠다면 분양 당시는 개발업자가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수공원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늘날 일산의 전체적 재산 가치를 아파트를 세웠던 것보다도 더욱  높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호수공원을 만들어 놓은 당시 정책입안자의 혜안에 존경을 표한다.

자동차 전용도로인 자유로를 이용할 수 없어 호수로를 따라 계속 북진하니 파주시가 나온다. 파주출판문화단지 앞을 지나 자유로와 나란히 가는 바로 옆길을 따라 오두산통일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까지 자전거로 오를 수 있었으나 바로 입구 50여 미터를 앞두고 제지를 당하였다.


올라가 보니 버스를 비롯한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버스도 가는 길을 자전거를 못 가게 하다니, 잊어버리면 책임도 안 질 사람들이 자전거를 두고 걸어가라 한다. 싸우기 싫어 불안감과 함께 계속 흘깃흘깃 자전거를 바라보며 전망대로 가야 했다.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밖에서 보는 전망도 남달랐다. 임진강 건너 저쪽이 아직 마음대로 오갈 수 없는 우리의 영토 북한임을 생각하니 분단국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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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징 : 오두산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현재 오갈 수 없는 임진강 건너 북한 오두산전망대에서 ⓒ 이규봉


올라가기 힘들었던 만큼 내리막길에서 보상받으며 오두산전망대를 빠져나왔다. 고생한 만큼 즐거움을 주는 자전거의 정직함을 항상 느끼며 359번과 1번 국도를 타고 임진각으로 들어섰다.

임진각 안에 있는 자유의 다리로 들어서니 바로 앞에 경의선 기차가 올라가고 있었다. 자유의 다리는 1998년 통일대교가 개통되기 이전에 임진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으나 지금은 막혀 있다. 1953년 휴전협정 후 전쟁포로 1만3000여명이 이 다리를 통해 돌아오면서 '자유만세'를 외쳤다 하여 '자유의 다리'로 불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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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징 : 경의선을 바라보고 있는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 ⓒ 이규봉


판문점엘 가기 위해 통일대교로 들어서니 다리 입구에 철조망을 두른 또 다른 분단의 상징이 나타나며 넘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 남한과 북한의 정상이 만나고 있는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웃도 방문할 수 없는 것이다. 분단의 최일선인 판문점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통일대교에 토해 놓고 문산에 도착하니 5시가 되었다. 숙박할 곳을 찾았으나 전국 어디든지 항상 있는 세칭 러브호텔 같은 모텔이 신기하게도 이곳에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8시 문산을 출발하여 37번 국도를 타고 임진강을 따라 북상하였다. 임진강을 건너는 다리마다 초소가 있고 민간인 통제를 하여 임진강을 넘어갈 수 없었다. 파평면을 지나 계속 올라가자 처음으로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나왔다. 민간인이 임진강을 넘어갈 수 있는 첫 번째 다리인 장남교를 건너가니 강 건너편에는 옛날 조상들이 타고 자유롭게 임진강을 넘나들던 황포돛배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장남면을 지나 신라의 마지막 왕의 묘인 경순왕릉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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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라한 능 경순왕릉 ⓒ 이규봉


비운의 신라 마지막 왕인 그는 935년 신라를 고려에 바친 후 인질 같은 신세로 살다 이곳에 묻혔다. 경주 이외에 묻힌 유일한 신라왕으로 왕릉치고는 초라한 그의 묘를 들러보니 우울한 상념에 젖는다.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에 기대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나 남은 것은 무엇인가? 해방 후 역사학자들은 당시를 통일신라라 하며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높이 평가하고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대단한 위인으로 적극 띄웠다. 나도 그러한 교육을 받은 세대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모든 영토와 심지어 백제의 일부 영토까지 모두 당나라에 빼앗긴 신라가 무슨 통일을 했단 말인가?

외세에 의존한 결과 한민족의 영토는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그 넓디넓은 영토가 한반도로 국한되어 현재에 이르지 않았는가?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은 공짜가 없고, 그 결과는 엄청난 민족의 희생이 뒤따라야함을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신라의 마지막 왕은 나라를 통째로 고려에 받치고 인질로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히 사라진 것이다. 한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김춘추를 이완용과 비교하면 무리일까?

곳곳에 영어 간판, 세종대왕 보기가 너무 부끄러워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임진강 너머 372번 도로를 타고 연천군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자주 보이던 파주군을 알리는 눈꼴신 입간판이 비로소 사라졌다. 거의 모든 자치단체가 다 그러하듯 영어로 파주시를 광고하는 것이 무척이나 눈에 거슬렸다. 누구를 겨냥한 광고판인지 모르겠다. 마치 예전에는 한자를 사용해야 지식인임을 나타내듯이 뜻도 모르는 영어를 버젓이 사용하고 있다. 'G&G PAJU' 이것이 노리는 광고효과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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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PAJU'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파주군 입간판 ⓒ 이규봉

맨 아래에 '대한민국 대표도시 파주시'를 영어로 표시 안 한 것에 안도감을 내쉬어야 할까? 세상이 영어에 미쳐 돌아가고 있다. 정부가 주도하여 모든 자치단체 모든 공공기관이 마치 영어를 안 쓰면 시대에 뒤떨어져 퇴물이 되는 양, 뜻도 모르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치 한글 말살 정책을 자진해서 공공기관이 앞장서고 있으니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창시한 세종대왕 보기가 너무도 부끄럽다.

누런 벼가 익어가는 연천군의 들판을 달려갔다. 군남면을 지나 3번 국도를 타고 신서면을 지나니 마침내 강원도로 들어선다는 알림판이 커다랗게 나타난다. 나의 고향 '강원도'. 말만 들어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이어 강원도를 상징하듯 언덕이 나온다. 서해안을 타면서  변산반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이 높은 언덕이 없이 평평하였으나 강원도로 들어오면서 더 이상 그러한 길은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동고서저의 전형적인 한반도 지형을 몸소 체험한다.

87번 국도를 타고 동송읍으로 내려가니 노동당사가 바로 길가 옆에 우뚝 서있다. 8․15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철원에서 악명을 떨쳤다는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는 폭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지금은 복원 중에 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려서 교육받은 그대로 한 영화의 잔인한 장면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어려서 교육은 이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국가논리에 앞서 가치관이 올바른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동송읍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도피안사라는 절을 방문하였다. 865년 신라시대 때 도선국사가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이라 하여 도피안사라고 이름 지은 이 절에는 철로 만든 부처님 상인 국보 철로비로사나불좌상이 있다. 마침 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러 올라오면서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어디서 왔어요."
"인천에서요."
"그래요? 참 대단하시네요."


함께 있던 옆의 아주머니는 한쪽 엄지를 나를 향해 추켜세운다.

"우리도 자전거 타요. OOO동호회 들어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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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인 도피안사 도피안사 ⓒ 이규봉


주말 숙박료 평일 두 배, 이것은 담합이 아닌가

철원읍사무소와 동송읍사무소가 같은 지역에 있는 이곳에서 토요일 하루를 묵었다. 군사도시인지라 외박이 많은 주말에는 평일 숙박료의 두 배를 받는다. 둘러본 모든 곳의 숙박료가 모두 같았다. 군청에서 허가를 받았다 한다. 이것은 담합에 해당하지 않는지 의심이 간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철원을 떠났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이곳은 정미소란 정미소는 모두 가동하고 있다. 추수가 끝난 양지리 들녘에는 수많은 오리 떼들이 널려 있다. 신기한 것이 있다. 수많은 오리 떼가 논의 한 블록에만 모여 있고 바로 옆 논에는 거의 없다. 직사각형 모양의 한 논에만 모두 앉아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하였다. 자동차가 지나다녀도 꿈쩍 안 하던 놈들이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자전거를 멈추고 가까이 가면 그새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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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오리 떼가 논의 한 블록에만 모두 모여 있다. 양지리 오리떼 ⓒ 이규봉


464번을 타고 한탄강을 따라 올라가니 동서로 뻗은 산 중턱에 막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군인초소가 나타났다. 김화까지 간다고 했더니 신분증을 요구하며 아주 친절하게 대한다. 그들이 주는 비표를 갖고 잠시 가니 또 다른 초소가 나타나 표를 전달해주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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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과 철원의 경계인 말고개 위에서 본 전경 말고개 ⓒ 이규봉


김화읍의 와수리를 지나 5번 도로를 따라 화천으로 향하였다. 강원도답게 주변에 평야는 거의 없고 도로 양쪽은 높은 산이 계속 이어진다. 이윽고 화천과 철원의 경계인 말고개에 올랐다. 도로 안내판에서 보여주는 고도와 돌로 된 표지석이 알려주는 고도가 무려 130m나 차이가 난다.

이곳에서 내려 보는 풍경은 개발되지 않은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통일이 되면 아마 이곳도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올라간 만큼 달려서 내려가니 파로호와 연결되어 있는 북한강 상류가 나온다. 강 건너에는 국제적으로 수달을 보호하자는 국제수달총회가 열리고 있다는 풍선이 높이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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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달을 보호하는 국제수달총회가 열리고 있는 화천 화천 ⓒ 이규봉


여행후기
1. 경기도 연천까지는 대체로 평탄하며 강원도 경계인 철원 입구부터 고개가 나타난다.
2. 갈 수 없는 길이 많으며 신분증은 반드시 갖고 다니기를 권장한다.
3. 우리가 분단국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4. 깨끗한 여관을 찾기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5. 길가에 농산물을 파는 곳이 전혀 없다.

거리(280km) 인천-100km-문산-100km-철원-80km-화천

#자전거여행 #자유의 다리 #철원 #화천 #호수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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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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